기원전(BC) 27년 1월16일 로마 원로원이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내렸다. ‘존엄한 시민’을 의미하는 이 칭호는 얼마 안 지나 뜻이 바뀌었다. ‘거대한 로마를 지배하는 황제’로. 역설적이게도 로마 원로원의 ‘아우구스투스 칭호’ 부여 만장일치를 이끌어낸 요인은 공화정 복귀 선언. 사흘 전인 1월13일 옥타비아누스는 모든 특권을 원로원과 시민들에게 돌려주겠다고 선언, 충격을 던졌다. 실제로 그는 크게 세 가지 특권을 스스로 버렸다.
첫째는 삼두정치권.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BC 44) 직후 안토니우스·레피두스와 함께 시작한 2차 삼두정치의 지분을 내려놓았다. 정적과 싸움에서 잇따라 이겨 홀로 남은 승자가 됐기에 필요도 없는 권리였지만 포기 선언은 로마 시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둘째는 이탈리아 서약. 이집트 클레오파트라 여왕과 결혼한 안토니우스를 공적으로 만들어 공격하기 직전에 로마 본토의 모든 시민에게 받아둔 약조였다. 역적 안토니우스를 치는 데 모든 지원을 다한다는 약조가 독재에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며 던졌다. 셋째, 같은 내용을 담은 속주의 맹세도 풀어줬다.
오랜 공화정의 전통을 갖고 있는 로마 시민들은 아우구스투스의 결단을 반겼다. 귀족과 의원들은 황제정으로 갈 수 있는 여건에서 권력이 다시금 원로원에 되돌아왔다고 여겼다. 기대는 빗나갔다. 말로 흉내만 냈을 뿐이다. 공화주의자들에게 암살당한 카이사르의 전철을 피하려 가짜 공약을 내걸었던 데 불과하다. 아우구스투스는 일곱 번째 임기를 맞던 집정관 직과 군 총사령관(임페라토르) 직위는 붙잡았다. ‘시민 중에 1인자’라는 프린켑스 칭호도 그대로 유지했다. 로마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 속았다는 점을 나중에야 알아차렸다.
끊임없이 내전을 펼쳐온 로마답지 않게 사실상의 제정을 받아들였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싸울 만한 사람들이 대부분 죽었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크라수스·안토니우스 등 1·2차 삼두정치에서 권력을 노리던 경쟁자들은 물론 공화정을 지키려 했던 브루투스와 당대의 정치인이며 문장가·철학자인 키케로까지 처형된 마당. 대적할 만한 인물이 사라졌다. 둘째는 고성장. 권력 싸움의 와중에서도 옥타비아누스는 공공시설물 건축사업을 펼쳐 미래를 생각하는 지도자라는 인상을 심었다. 전리품을 사심 없이 국가에 귀속한 점도 높게 평가받았다. 이집트 원정에서 획득한 금은보화가 얼마나 많았는지 연 12%에 이르렀던 이자율이 4%대로 떨어질 정도였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