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2월12일 오스트리아 북부 린츠시. 시프호텔에 경찰과 우익 민병대인 ‘향토방위대’가 들이닥쳤다. 불법 무기를 은닉했는지 수색하기 위해서다. 좌파 야당인 사회민주당원이 운영하던 시프호텔 측이 ‘민병대의 수색은 위법’이라고 항변해도 막무가내였다. 결국 좌익 민병대인 ‘공화경비대’가 출동하고 양측은 총격전을 벌였다. 오스트리아 3대 도시인 린츠에서 터진 총격전은 바로 전국으로 퍼졌다. 결과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자본가와 교회의 후원을 받는 우익 민병대가 좌파 민병대를 나흘 만에 눌렀다.
결정적으로 파시스트화하던 우파 엥겔베르트 돌푸스 총리의 명령으로 연방군이 가세하며 승부는 일찌감치 갈렸다. 짧게 끝난 내전에서 우파 사망자는 108명인 반면 좌파는 1,000명이 넘게 죽었다. 검은 진영(우파)과 붉은 진영(좌파) 간 내전은 시기의 문제일 뿐 피할 수 없는 충돌이었다. 1차 세계대전 패전과 함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해체되고 인구 700만명에 불과한 독일인 국가로 쪼그라든 상황에서 좌우 정치세력이 극한 대립으로 치달았으니까. 1918~1920년의 짧은 대연정이 지난 뒤 가톨릭 보수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진영 간 골은 갈수록 깊어졌다.
세계 대공황에 따른 경제난 속에서 두 세력의 중도파는 힘을 잃고 갈수록 극좌와 극우가 판치며 서로 민병대를 경쟁적으로 키웠다. 중산층과 지식인·노동자들의 지지로 대도시의 지방정권을 차지한 사민당은 대규모 공공주택과 무상교육을 앞세워 부유층에 과중한 세금을 걷어 계층 간 갈등도 심해졌다. 나라 전체도 도시(좌파)와 농촌(우파)으로 갈라졌다. 공정해야 할 법원의 일방적인 판결로 기세등등해진 극렬 민병대는 갈수록 행패를 부렸다. 사회적 갈등을 치유해야 할 종교는 오히려 분열을 부추겼다.
내전 이후 오스트리아는 독일과의 합병과 패전, 신탁통치의 길을 밟았다. 히틀러 치하의 감옥에서 좌우 정치인들은 극한 대립을 통렬히 반성하며 조국의 새로운 미래를 꿈꿨다. 그나마 오스트리아 얘기는 해피엔딩이다. 전후 화해와 통합에 의한 대연정으로 눈부신 성과를 냈으니. 문민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과 부총리를 지낸 안병영 전 연세대 교수의 역저 ‘왜 오스트리아 모델인가’에 따르면 내전 직전 오스트리아와 오늘날 한국 사회의 대립과 갈등은 세계 정치사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다. 오스트리아식 영구중립 통일론을 꺼내기만 해도 빨갱이로 보는 시각도 여전하다. 우리는 왜 그 많은 희생을 치르고도 이념의 덫과 갈등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