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알아챘어야 했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반년이 채 안 된 지난 2017년 10월 초. 임기 만료를 앞둔 한 금융협회장의 후임 하마평에 뜻밖의 인물이 등장했다. 1급, 기껏해야 차관급이 노리던 자리에 전직 장관이 유력하다는 얘기였다. 후배 관료들 사이에서는 “우린 어딜 가라고”라는 푸념이 터져 나왔다. 그는 기어이 회장이 됐다. 몇 달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또 다른 전직 장관급 인사가 금융공기업의 수장에 올랐다. 정권의 뒤바뀜은 참여정부에서 요직을 지낸 두 인물을 10년 만에 거리낌 없이 소환해냈다.
한국 금융산업의 지배구조는 신기할 정도로 변하지 않는다.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도 지배구조만큼은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권세가들은 가장 먼저 금융을 향해 탐욕의 손길을 내밀었고 금융회사는 저항도 못 한 채 먹잇감이 됐다.
그나마 과거 정권에서는 전리품을 챙기는 와중에도 글로벌 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금융회사를 만들겠다며 다양한 형태의 육성 계획을 만들었다. 현 정권의 뿌리인 노무현 정부는 출범 첫해 청사진을 뜻하는 파란색 표지의 금융산업 발전방안을 내놓았고 실현 가능성은 차치하더라도 동북아 금융허브의 개념을 꺼냈다. 이명박 정부의 메가뱅크론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창조금융 역시 금융산업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런데 현 정부 들어 금융은 홀대론이 나올 정도로 관심의 영역에서 제외됐다. 카카오뱅크 등 인터넷은행과 핀테크가 싹텄다지만 정부는 실상 규제를 가하는 훼방꾼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금융회사를 인사의 놀이터로 생각하는 것만큼은 달라지지 않았다. “청와대가 금융권을 잡고 나가려면 유재수(전 금융위원회 금융정책국장)와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청와대 실력자의 발언은 현 정부의 시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국민연금 이사장은 정권 출범과 동시에 여권 정치인의 몫이 되더니 총선이 다가오자 뒤도 안 보고 나갔다. 기업은행장은 어떤가. 정부가 처음 내민 카드는 고용 참사로 문책당한, 그것도 금융에 몸담은 이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물이었다. 힘들게 자리에 오른 현 행장 역시 모양새가 개운치는 않다. 청와대가 임명의 배경으로 밝힌 “국정 철학을 잘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말 자체가 구차하다. 언제부터 기업은행장이 국정 철학까지 필요한 자리가 됐나. 앞으로 국정 철학을 모르는 내부 인사는 행장이 될 수 없다는 말인가.
더 볼썽사나운 것은 요란하게 반대를 외쳤던 노조가 투쟁의 깃발을 스스로 내린 과정이다. 여당 원내대표는 입을 맞춘 듯 ‘매우 유감’이라는 미사여구로 노조를 달랬고 노조는 덤으로 노조추천이사제까지 얻어냈다. 은행장 자리를 노동이사제와 맞바꾼 셈이다. 정치권뿐만 아니라 노조까지 금융회사의 지배구조를 쥐락펴락하는 상황, 이것이 바로 현 정부 금융산업의 실체다.
정치(政治)에 이어 노치(勞治)가 판을 치는데 관치(官治)의 본가인 금융당국이 뒷짐을 지고 있을 리 없다. 금융회사들에 당국은 예나 지금이나 생살여탈권을 움켜쥔 갑 중의 갑이다. 지난해 금융당국과 한국은행의 퇴직자 20명 가운데 14명이 금융 관련 기관으로 갔고 이중 9명이 금융감독원 출신이었다. 주요 은행의 감사는 금감원의 전임 국장들로 꽉 채워져 있다. 한때 감사원 등에 자리를 내주기도 했지만 터줏대감은 여전히 금감원 출신이다. 금융회사가 만만하니 파생결합펀드(DLF)처럼 대형 사고가 터져도 감독당국은 관리 부실 책임을 질 생각을 하지 않고 최고경영자(CEO)에게만 목을 내놓으라 외친다. 전형적인 편의주의 행정이다.
국내 금융산업은 저금리와 대출 규제에도 지난해 4대 금융그룹의 순이익이 11조원을 넘어서며 역대 최고 기록을 세우는 등 휘파람을 불었다. 하지만 독버섯처럼 뿌리 내린 치(治)의 꼬리표를 떼어내지 못하는 현실에서 제아무리 화려한 성적표를 일궈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김영기 논설위원 young@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