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기고] 협력의 진화

<박일준 한국동서발전 사장>

"기업 이득 최대화 방법은 협력"

고품질 부품 공급-합당한 대가

대·중기 상생 생태계가 생존 좌우

박일준 한국동서발전 사장박일준 한국동서발전 사장



지난 1967년 프랑스의 브누아 망델브로 박사는 과학잡지 ‘사이언스’에 ‘영국을 둘러싸고 있는 해안선의 총 길이는 얼마인가’라는 글을 발표했다. 해안선의 길이는 어떤 잣대로 재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기린과 생쥐가 해안선을 따라 달리기를 한다고 가정해보자. 생쥐는 걸음 폭이 좁아 세세한 곳까지 일일이 거쳐 가야 하는 반면 기린은 걸음 폭이 넓어 단번에 성큼성큼 지나갈 수 있다. 생쥐의 입장에서는 1㎞나 되는 먼 길이 기린에게는 100여m도 되지 않는 짧은 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망델브로 박사가 언급한 기린과 생쥐의 달리기는 우리나라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격차를 떠올리게 한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18년 기준 우리나라 전체 기업의 99%를 차지하는 중소기업이 벌어들인 영업이익은 22%로 나타났다. 전체 기업의 0.3%인 대기업은 영업이익의 64.1%를 차지했다. 대·중소기업 간 격차가 심하게 벌어진 것은 우리나라가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갖고 있어서다. 불평등 해소를 위한 우리 사회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지만 중소기업의 어려움은 여전해 상생협력이 과연 중소기업의 잣대에서 진행되고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대·중소기업 간 상생과 협력이 이뤄지지 않으면 경제는 이상 신호를 낼 수 있다. 납품업체들이 기술개발로 고품질의 부품을 공급하고 대기업이 합당한 대가를 지불한다면 우리 경제는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세계적인 제조기업들이 부품업체들과 유기적인 협력 생태계를 구축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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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근무 중인 동서발전은 중소 협력사 100여곳과의 협업을 통해 운영되고 있다. 재임기간 중 모든 협력사를 방문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적어도 절반 이상을 찾아가보자고 마음먹었다. 현장에서 답을 찾기 위해 6개월에 걸쳐 서울·경기와 충청도, 경상도를 돌며 협력 중소기업 16곳을 찾아갔다. 회사마다 경영상황이 다르니 고민도 다양했다. 한 기업은 국산화 개발품을 현장에 적용하기가 어렵다고 토로했고 다른 기업은 신규 해외사업에서 판로를 확보하기를 희망했다. 구매상담회에서 상담 기회를 더 많이 갖기를 원하는 기업도 있었다. 협력 파트너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중소기업이 일차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제품 구매와 판로 확보라는 점을 깨달았다.

대·중소기업 간 협력이 성공하려면 눈앞의 단기 이익을 좇는 경영에서 벗어나 시간을 들여 힘을 합쳐야 한다. 필자가 그간 협력 파트너를 만나러 발품을 팔며 돌아다닌 거리를 계산해보니 약 4,500㎞였다. 한반도 둘레를 하나로 잇는 코리아 둘레길의 거리와 같다. 형식적으로 방문해서 이야기만 듣고 온다면 협력이 아니라 둘레길 탐방을 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현장에서 청취한 건의사항 총 32건 중 회사에서 지원할 수 있는 30건에 대해 반영하도록 조치했다.

미시간대 정치학과 교수인 로버트 액설로드는 저서 ‘협력의 진화’에서 “경쟁사회에서 자기 이득을 최대화할 수 있는 최고의 생존전략이 협력”이라고 말한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는 기업 간 협력을 통해 기술혁신을 얼마나 이뤄내는가에 따라 기업의 생존이 좌우될 것으로 전망된다. 기술을 개발한 제품의 판로가 확보되지 않아 경쟁력 있는 기술이 사장되는 환경에서는 기술혁신이 이뤄지기 어렵다. 대기업과 공공기관이 앞장서서 중소기업이 축적된 기술과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상생의 생태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상생을 향한 발걸음을 내디뎌보자. 경영자가 현장을 찾아 건의사항을 직접 해결하고 관계를 지속해나간다면 값진 상생협력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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