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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 - 너 어디에서 왔니(한국인 이야기-탄생)] '米壽'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韓문화의 힘

■이어령 지음, 파람북 펴냄




별 것 아닌 듯 보이는 이야기에도 깊은 의미를 담아내어 ‘별 것’으로 들리게 하는 이가 있다.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로 30여 년을 재직하고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냈던 한국의 대표 지성이자 최고의 ‘이야기꾼’, 이어령 선생이다. 올해 미수(米壽)를 맞은 이어령 선생이 반 세기가 넘는 지적 여정을 갈무리하는 마지막 이야기 보따리를 펼친다. 총 12권으로 기획된 신간 ‘너 어디에서 왔니(한국인 이야기)’의 첫 번째 편, ‘탄생’이다.


책은 어릴 적 듣던 꼬부랑 할머니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지팡이를 짚고 꼬부랑 고개를 넘어가다가 강아지를 만나…’로 시작하는 그 옛날 이야기다. 그런데 이 별 것 아닌 이야기에서 지적인 의문이 제기된다. 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길은 모두 왜 꼬부랑길이고, 할머니는 꼬부랑 할머니일까. 지팡이는 왜 또 꼬부랑인가. 그 해답은 ‘랑’에 있다. ‘랑’자의 부드러운 소리를 타고 꼬부랑 할머니, 꼬부랑 고갯길은 결코 힘겹기만 느낌이 아닌 곡절을 견뎌내는 신명과 흥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쓰린 아픔에도 ‘랑’ 자를 붙이면 구슬프면서도 신명 나는 노랫가락이 된다. 별 것 아닌 한 음절 ‘랑’은 그렇게 한국 문화의 특수성과 독창성, 한국인의 감수성의 원천으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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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러한 특별하고 독특한 한국의 유전자, 한국인의 유전자 덕에 한국이 작은 땅덩어리에 부족한 자원으로도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짚는다. 비슷한 언어가 전혀 없을 정도로 고립어에 속하는 한국어로 만든 영화 ’기생충’이 ‘1인치의 장벽’을 넘어 오스카 4관왕에 오르고, 외국인들이 방탄소년단의 한국어 노래를 그대로 따라 부르는 현실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한국인의 문화 유전자는 농경 사회 이전, 채집시대부터 이어져 온 것이다. 인간의 유전자나 두되 등 모든 생장 조건은 수렵채집 시대에 형성되어 그대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그리고 한국인은 오늘날까지 채집 문화의 흔적을 가장 많이 지닌 집단이다. 나물 문화를 여전히 유지하고, 정보를 모은다는 단어로 ‘캔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점이 그 근거다. 낯선 열매와 풀을 먹기 전 반드시 냄새를 맡고 혀로 맛보며 먹을 수 있는지 없는지 정보를 파악한 수렵인의 문화, 지식이 아닌 지혜로 자연의 힘을 발견해 낸 채집형 한국 문화가 오늘날까지 인간 속에 잠들어 있던 수백만 년 전의 ‘생명 기억’을 자극해 오늘날 세계를 뒤집어 놓은 한류(韓流)의 원천이 됐다고도 한다. 한 손에 호미를 들고 다른 손에 최첨단 스마트폰을 든 한국인에게서 다가올 생명화 시대의 연결고리를 찾아낸 저자의 깊은 통찰력을 책을 통해 나눌 수 있다. 1만9,000원


연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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