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늘의 경제소사] 1936년 日 2.26 사건

군부 통제 전시체제 굳혀줘




1936년 2월26일 도쿄 총리 관저. 구리하라 야스히데 중위가 지휘하는 300여명의 군인이 들이닥쳤다. 병사들은 대좌(대령) 한 명을 총리로 오인해 죽였다. 비슷한 시간 다른 부대도 7개 목표에 도착해 살생부에 적힌 정치인들을 죽였다. 도쿄에 주둔한 보병 1·3연대와 근위연대의 청년 장교 22명이 1,483명의 병력을 동원한 쿠데타로 장관급 인사 3명을 비롯한 4명이 총과 칼로 죽임을 당했다. 총리 관저를 지키며 쿠데타군에 응전하던 경찰 4명이 즉사하는 등 경찰도 5명 사망에 수 명이 부상을 입었다. 민간인과 공무원 부상자도 십수 명 발생했으나 쿠데타군의 피해는 없었다.


쿠데타군의 최고 상급자 계급은 대위.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청년 장교들은 ‘존황토간(尊皇討奸)’을 명분으로 내걸었다. 일본 왕을 제대로 받들기 위해 간신들을 치겠다는 뜻이다. 세계 대공황의 파장으로 심해지는 경제난과 진급 지연 등 모든 혼란이 서구 문물주의에 젖은 정치인 탓이라 여긴 장교들은 일왕 중심의 국가사회주의를 꿈꿨다. 자본가들을 내쫓아 모든 기업을 국유화한다는 생각도 품었다. 앞으로 벌어질 총력전에 대비해 군비 생산을 늘려나가야 한다는 통제파에 맞서 스스로를 황도파(皇道派)로 규정했던 청년 장교들은 성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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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장교들은 일본 왕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빗나갔다. 사건을 보고받은 일왕 히로히토가 ‘반란’으로 규정한 순간, 쿠데타 세력은 흔들렸다. 27일 계엄령이 발동되고 요코하마에 정박한 전함의 함포가 반란군 주둔지를 겨눴다. 결국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다. 장교 2명이 자결하고 세 차례의 재판 결과 주모자 및 적극 가담자 18명이 교수대에 올랐다. 6명이 무기징역형, 22명은 1년 6개월~6년의 징역형을 받았다. 공교롭게도 2·26 쿠데타군이 응징 대상으로 삼았던 통제파가 전면에 서게 되고 군부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전시체제가 굳어졌다.

2·26 사건은 한국사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쿠데타 관련 장교들이 대거 봉천군관학교와 만주군으로 좌천돼 조선인 생도들을 가르쳤다.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에 따르면 5·16 직전의 박정희 소장은 ‘일본의 젊은 우국 장교들의 2·26 거사’를 동경하며 쿠데타를 꿈꿨다고 한다. 한국 근대사의 불행은 정치군인의 책임만은 아니다. 윤보선·최규하 대통령은 일왕처럼 쿠데타에 맞서지 못하고 가늘게 사는 길을 택했다. 비겁하다. 이 땅에서 쿠데타 가능성은 완전히 없어졌을까. 예비역 장군의 일부가 공공연하게 쿠데타를 부추기는 꼴이라니. 연금이 아깝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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