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고려의 국새 찍힌 과거합격증, 보물되다

고려말 문과급제한 최광지의 합격증 '홍패'

명에서 받은 고려 국새 찍힌 유일한 공문서

'고려사' 기록 확인 실물, 공문서 형식의 유래

‘고려국왕지인’이라는 국새가 찍힌 고려시대의 과거 합격증인 ‘최광지 홍패’가 3일 보물로 지정 예고 됐다. /사진제공=문화재청‘고려국왕지인’이라는 국새가 찍힌 고려시대의 과거 합격증인 ‘최광지 홍패’가 3일 보물로 지정 예고 됐다. /사진제공=문화재청



‘성균생원 최광지 병과 제삼인 급제자(成均生員 崔匡之 丙科 第三人 及第者)’

고려 말에 태어나 조선 초까지 활동한 전주 최씨 가문의 최광지는 고려 창왕 1년이던 1389년 문과에 급제했다. 을과(乙科), 병과(丙科), 동진사(同進士)로 구분되는 문과시험에서 ‘병과 제3인(丙科 第三人)’이라 적힌 과거 합격증을 받았다. 고려 말기 문과 정원 총 32인은 성적 순으로 을과 3명, 병과 7명, 동진사 22명을 뽑았다. ‘병과 제3인’이라는 최광지의 성적은 전체 6등에 해당한다.

최광지는 이 같은 내용의 합격증인 ‘홍패(紅牌)’를 받아들고 뛸 듯이 기뻤으리라. 고려와 조선 시대에 발급된 문과와 무과 합격증은 홍화씨 등으로 붉게 염색한 종이로 발급됐기에 ‘홍패’라 불렸다. 반면 생원과 진사시험 통과자에게는 흰 종이의 합격증인 ‘백패(白牌)’가 발급됐다.


홍패에는 와 ‘홍무 이십이년 구월 일(洪武 貳拾貳年 玖月 日)’이라는 발급연월일도 적혀 있으며 그 위에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라는 국새(國璽)가 찍혀 있다. 고려국왕지인은 고려 공민왕 19년(1370년) 명나라 황제 홍무제가 고려에 내려준 국새이며, 조선 건국 후인 태조 2년(1393년)에 명에 다시 반납됐다. 23년 가량 사용된 국새임에도 ‘고려 시대’ 공문서에 이 직인이 찍힌 사례는 ‘최광지의 홍패’가 지금까지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개국 직후이며 이 국새가 중국에 반납되기 전이던 조선 태조1년(1392년) 10월에 태조 이성계가 개국공신 이제(李濟·생년미상~1398)에게 내린 ‘이제 개국공신교서’에 이 ‘고려국왕지인’이 사용된 사실이 있을 뿐이다. 이제 개국공신교서는 국보 제324호이다. 1등 개국공신에게 주어졌으며 조선 최초로 발급된 공신교서이자 실물이 전하는 유일한 것이라는 점에서 국보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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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로 지정예고된 ‘최광지 홍패’ 중 고려국왕지인의 국새가 찍힌 부분의 세부 모습. /사진제공=문화재청보물로 지정예고된 ‘최광지 홍패’ 중 고려국왕지인의 국새가 찍힌 부분의 세부 모습. /사진제공=문화재청


문화재청은 630년 전에 발급된 고려 시대 과거합격증인 ‘최광지 홍패’을 3일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현재까지 알려진 고려 시대 홍패는 총 6점이다. 발급 시기는 모두 ‘최광지 홍패’ 보다 빠르지만 관청에서 왕명을 대신해 발급했기 때문에 국왕의 직인이 없다는 점이 다르다. 문서의 형식과 성격 측면에서도 ‘왕지(王旨·왕명)’라는 문서명과 국왕의 인장이 찍힌 것 등 임금의 명령을 직접 실천한 공식문서로서 완결된 형식을 갖추고 있다. 또한 1276년부터 과거합격증에 ‘왕지(王旨)’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했다는 ‘고려사’의 기록을 처음 확인시킨 실물이라는 점, 조선 시대 문서제도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 문화재청 측 관계자는 “이처럼 왕명의 직인이 찍혀 있고 형식상 완결성을 갖춘 예는 ‘최광지 홍패’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면서 “이같은 형식은 후대로 계승돼 조선 시대 공문서 제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보물 지정의 배경을 설명했다.

고려시대의 홍패 중 1205년에 발급된 ‘장양수 홍패’가 국보 제181호이며 1305년의 ‘장계 홍패’, 1355년의 ‘양이시 홍패’와 1376년의 ‘양수생 홍패’가 보물로 지정돼 있다.

문화재청은 30일간의 예고 기간 동안 각계의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이 유물을 보물로 지정할 예정이다.


조상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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