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심화로 세계 각국이 한국에 빗장을 닫아걸면서 글로벌 자금조달에 빨간불이 켜졌다. 초우량채로 평가받는 공기업마저 발행 계획을 잇따라 연기하는 등 국내 기업들의 자금 경색 우려가 깊어지고 있다.
9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한국석유공사는 이달 말께 예정된 5억달러 규모 외화채권 발행을 하반기로 연기했다. 만기가 돌아오는 채권은 국책금융기관에서 차입금을 늘려 상환한다. 이와 별개로 국내에서 2,500억원어치 전자단기사채(전단채)를 발행해 운영 자금을 조달하기로 했다.
한국석유공사는 지난달 BNP파리바와 HSBC·UBS·씨티그룹글로벌마켓증권·산업은행 등을 주관사로 선정하고 외화채권 발행을 준비해왔다.
KP물(Korea Paper·한국 기업이 외화로 발행하는 채권)은 올해 초까지만 해도 우호적인 수급을 바탕으로 강세를 이어왔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가 심화하면서 리세션(경기침체) 우려와 안전자산 선호 현상으로 글로벌 금융시장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국내 감염자 수가 큰 폭으로 증가하자 한국발 비행기에 대해 입국금지하는 국가들도 늘어났다. 특히 아시아 로드쇼의 중심인 홍콩과 싱가포르에서도 한국 전역에 대해 입국금지 조치를 내리면서 투자자 접점을 만드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IB 업계의 한 관계자는 “발행사도 투자자도 사실상 관망 상태”라며 “현지에서는 글로벌 기업이 전화회의를 통해 투자 수요를 확보하기도 하지만 이마저도 한국 기업에는 어려운 분위기”라고 말했다.
한국광물자원공사도 지난달 25일 계획했던 3억호주달러(약 2,400억원) 규모의 외화채권(캥거루본드) 발행을 연기했다. 변동성 확대 등을 이유로 글로벌 투자자들이 금리조건을 높이는 등 발행에 부정적 환경인 것으로 판단했다. 향후 시장이 풀리면 조달을 재개할 계획이지만 불확실성이 커짐에 따라 무기한 연기됐다.
대부분 기업의 글로벌 자금조달은 지난 한 해 동안의 사업보고서 제출이 완료되는 이달 말부터 본격화한다. 해외투자가를 대상으로 한 투자설명서에 적용하는 회계 결산자료의 유효시한이 135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가 얼마나 장기화할지 예단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국내외 초우량채로 평가받는 공기업마저 발행을 연기하자 일반 기업들의 우려는 더욱 커지고 있다. 다음달 외화 영구채(신종자본증권) 발행을 준비하는 동양생명(082640)과 대한항공(003490)도 외화채 발행이 어려울 경우를 대비해 국내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플랜B’를 검토하고 있다.
시장에서는 이 같은 글로벌 투심 약화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불확실성 심화와 더불어 일반기업들의 글로벌 신용등급이 뚜렷한 하향 기조를 보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지난달 한국의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1.9%로 하향 조정하면서 “한국 내 코로나19 확산은 이마트와 롯데쇼핑 등 유통업체뿐만 아니라 철강업 등 타 산업에 속한 기업의 신용도에도 직간접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김준용 NH투자증권 크레딧 연구원은 “올해 들어 총 11곳 국내 기업의 신용등급 및 등급 전망이 강등됐다”며 “코로나19 확산도 신용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향후 일반 회사채를 중심으로 KP물의 가산금리(신용 스프레드) 확대는 불가피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