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보건기구(WHO)가 지난 11일(현지시간) ‘팬데믹(세계적 대유행)’할 만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되면서 한국 질병관리본부의 몸값이 급격히 올라가고 있다. 선제적으로 쌓은 진단 노하우를 알려달라는 전 세계 각국의 요청이 쇄도하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검진 관련 문의를 보낸 국가 리스트엔 최근 정치적 이유로 한국과 외교 마찰을 일으킨 일본까지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 7월 도쿄올림픽이 다가오는 가운데 아베 내각의 다급한 처지가 엿보이는 한 단면이라는 분석이다.
전세계 ‘SOS’ 요청 속 질본 문 함께 두드린 日
정부당국과 소식통에 따르면 최근 미국·프랑스를 비롯해 미주·유럽·동남아시아·중동 등에서는 10개 이상 나라가 한국 질본에 진단 시스템, 감염자 관리, 치료센터 구축 등에 대해 자문을 요청했다. 해당 국가들 가운데는 외교부를 통해 정식 요청을 보낸 나라도 있지만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등 지역공동체를 활용하거나 보건당국자가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직접 편지를 쓴 경우도 있었다.
특히 이들 중에는 한국과 정치적으로 극한의 대립 상태에 놓인 일본도 포함돼 관심이 쏠렸다. 일본은 한국 외교부나 보건복지부 차원에서 연락을 취하지 않고 WHO 국제보건규약(IHR) 국가연락담당관을 통해 질본에 직접 접촉했다. 일본은 질본 측에 한국의 검진현황과 검진기관 수 등 진단 관련 정보를 물어본 것으로 확인됐다. <관련기사> ▶[단독] '외교갈등' 日, 뒤에선 韓질본에 '코로나 검진정보 SOS'
보건복지부는 지난 13일 서울경제가 관련 내용을 보도하고 몇 시간이 지난 뒤 ‘일본이 질본에 진단 노하우를 요청했다는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라는 ‘단 한 문장의’ 짤막한 보도설명자료를 냈다. 일부 언론들은 별다른 사실관계 확인 과정 없이 이 자료 문구만을 그대로 인용해 보도했다.
하지만 그 직후 방역당국 관계자는 본지 취재진과의 전화 통화에서 “일본의 경우는 ‘진단 노하우를 요청’한 것이 아니고 ‘한국의 진단현황과 진단기관 수 등을 문의’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다”라고 해명했다.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일본 보건당국이 한국 질본과의 국제 네트워크를 이용해 ‘자동 공유’되는 정보만 받은 게 아니라 질본 측에 직접 ‘문의’를 해 추가 정보를 얻으려 한 사실 자체는 맞다는 의미였다. 방역당국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요청’의 방식이 아니었을 뿐이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진단방법이나 진단키트 등에 주목한 국가들도 여럿 있었으나 일본이 궁금해한 건 주로 우리의 검진현황 정보였다”고 덧붙였다. 일본의 관심은 한국이 사용하는 진단방법·키트 등 의료기술적인 정보보다 검진기관 수 등 한국의 국가적 지원 시스템을 확인할 수 있는 현황 정보에 집중됐던 셈이다. “진단 노하우 요청은 아니다”라는 질본 측의 공식 입장도 이 같은 맥락에서 나온 해명이었다.
한국과 일본에선 지난 1월 비슷한 시기에 첫 확진자가 나왔지만, 한국이 지금껏 25만여 명을 진단하는 동안 일본의 검진 인원은 한국의 20분의 1 수준에 그치고 있다. 이에 비춰 보면 의료기술 수준은 이미 높은 일본 입장에서 2015년 메르스 사태 등을 거치며 한층 진화한 우리의 검진 체계 현황 자체가 어쩌면 ‘진짜 노하우’였는지도 모른다.
일본 보건당국의 이 같은 움직임은 아베 내각이 그간 한국에 취한 자세와도 상당히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이달 초 WHO에 “코로나19 우려국으로 한국 등과 같이 언급하지 말아 달라”고 한 것을 비롯해 지난 5일에는 한국인에 대해 선제적으로 입국제한 조치를 내리는 등 공식적으로는 한국의 방역 상태에 대해 불신하는 입장을 표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도쿄올림픽 개최가 불투명해진 데다 미숙한 코로나19 대응으로 자국 여론이 나빠지자 아베 신조 총리가 방역을 빙자한 정치적 카드를 꺼냈다는 분석이 주를 이룬다.
여기에 문재인 정부까지 아베 내각의 카드를 그대로 받아 맞불 작전으로 나서면서 코로나19 사태는 양국 정권의 지지층 결집과 정치 싸움 이슈로까지 번진 모양새다. 지난해 ‘수출규제-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갈등 이후 한동안 소강 상태를 맞았던 한일관계는 이제 2차전에 접어든 듯 악화됐다. <관련기사> ▶[뒷북정치] 文정부의 '제2차 항일전쟁', 어떤 명분과 실익 얻길래
정부의 한 관계자는 “일본 보건당국이 최근 공식 외교 채널로 연락한 적은 없다”며 “질본의 독자적인 국제 보건 네트워크를 활용해서만 접촉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다급해진 아베 내각... 질본 “국내 안정세가 우선”
선진국을 막론하고 세계 각국이 앞다퉈 한국 질본에 검진 노하우 공유를 요청하는 것은 코로나19가 팬데믹 상태로 돌입하면서 선례 학습이 시급해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국은 질본을 중심으로 초기 감염국 중 가장 빠르고 투명하게 검진을 진행하고 있어 하루 1만 건 이상의 진단 비법을 배우려는 후발국들의 문의가 점점 더 늘고 있다는 후문이다.
또 다른 정부 관계자는 “한국 진단 시스템을 배우려는 각국 수요는 굉장히 다양한 채널을 통해 들어온다”며 “경로가 나뉘어 있어 일괄적으로 파악이 안 될 정도”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이 같은 흐름 속에 일본 역시 더 이상 정치적 이유로 보건 협력과 적극적인 검진을 미룰 수 없다는 판단이 선 게 아니냐는 진단이 나왔다. 일본 보건당국의 질본 접촉 또한 올림픽 취소·연기 가능성까지 제기되는 상황에서 아베 내각의 절박한 분위기가 반영된 하나의 사례라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일본 국가안전보장국의 기타무라 시게루 국장은 지난 11일 총리 관저에서 남관표 주일 한국대사와 쿵쉬안유 주일 중국대사를 각각 만나 “한중일 보건당국이 (코로나19 관련) 정보 공유를 강화하자”고 제안했다. 아사히신문은 기타무라 국장이 이 자리에서 “지난 5일 발표한 한중 입국제한 강화엔 정치적인 의도는 없었다”며 대사들에게 양해까지 구했다고 전했다. 애초 한중일 보건협력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일본이 갑자기 뒤늦게 태도를 바꾼 것이다.
한편 질본은 현 국내 상황도 녹록지 않은 만큼 각국의 요청에 적극 대응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보였다. 방역에 대한 국제공조의 중요성은 인식하지만 국내 확진자가 확연히 안정세로 접어들기 전까지는 인적·물적 여력이 부족하다는 판단에서다.
질본의 또 다른 관계자는 “현 시점에서는 국제학술지를 통해 진단 방법, 유전자 염기서열 분석결과 등의 자료를 공유하는 수준으로만 협조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