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정부서울청사 외교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껄끄러운 관계를 이어가던 한국과 중국, 일본의 외교부 국장들이 돌연 유선 회의를 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들은 이날 코로나19 관련 세 나라 간 정보 공유와 방역 협력 방안에 대해 전향적으로 의견을 나눴다.
이는 다소 의외의 진전이었다. 표면적으로나마 협력을 강조해 온 한국, 중국은 물론 3국 협력에 그간 미온적이었던 일본까지 합세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이후 절차는 속전속결이었다. 사흘 뒤인 20일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왕이 중국 외교부 부장, 모테기 도시미쓰 일본 외무상이 화면으로 서로를 마주했다. 한·중·일 외교 장관 화상회의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날 회의 결과 중에는 특히 세 장관이 ‘완전한 형태의 도쿄올림픽 개최를 지지한다’고 입장을 모은 부분이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외교가에선 한국과 중국, 일본이 방역 중요성을 3국 협력의 공통된 명분으로 내세우고는 있지만 그 이면에는 서로 각기 다른 목적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실속 외교’를 위해선 각국의 속내부터 잘 살펴야 한다는 지적이다.
기업활동 유지에 사활 건 한국
한·중·일 협력 논의 과정에서 한국이 최종적으로 노리는 목적은 비교적 명확하다. 한국 외교부는 17일 국장급 회의 때부터 “방역 문제를 넘어 입국제한 조치 해제 문제까지 상의할 것”이라는 입장을 줄곧 내비쳤다. 무엇보다 기업인에 대한 우선적인 예외 입국조치는 대외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최선결 과제로 꼽힌다.
일본 정부는 지난 9일부터 한국·중국 입국자 전원에 대해 격리 조치를 내리고 한국에 대한 무비자 입국 혜택도 중단했다. 중국도 25개 지방정부가 제각기 다른 기준으로 격리 조치 등 한국인 입국을 제한하고 있다. 한국의 교역국 중 수출·수입량이 모두 1위인 중국과 수출량은 5위권, 수입량은 3위권인 일본이 나란히 빗장을 걸면서 우리나라 경제엔 비상등이 켜진 상황이다.
실제로 우리 외교부는 전세계 174개국이 이미 한국인 입국에 제한을 건 상태에서도 “기업인만은 예외로 풀어 달라”는 요청을 각국에 수시로 전달하고 있다. 강 장관은 지난 19일에도 캐나다·호주·브라질·이탈리아·터키 등 5개국 외교 장관과 유럽연합(EU)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에게 기업인 예외입국 필요성을 강조했다. 외교부가 이 같은 노력으로 기업인에 한해 입국제한을 푼 나라는 현재까지 10여 곳에 달한다.
강 장관은 20일 3국 외교 장관 화상회의에서도 “교류·협력 위축과 경제·사회적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업인 예외입국 필요성에 대해 큰 틀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이날 3국 장관들 중에서도 강 장관은 눈에 띄게 경제 문제를 강조했다. 거대한 내수 시장을 보유한 중국과 일본의 외교 장관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외교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필수적인 경제 활동이 위축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외교부 입장”이라며 “특히 중국은 최대 (교역) 상대국이라 초기 단계부터 기업인 예외입국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도쿄올림픽 개최에만 집착하는 일본
당초 일본은 한·중·일 방역 협력에 가장 소극적인 나라였다. 세 나라가 이번에 전격적으로 머리를 맞대게 된 데도 일본의 입장 변화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일본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건 무엇보다 오는 7월 개최 예정인 도쿄올림픽 때문이었다. 코로나19 사태가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걷잡을 수 없이 번지면서 정상적인 올림픽 개최에 대한 국제적 지지가 시급해졌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최근 올림픽 연기·중단 가능성이 곳곳에서 제기되며 일본은 수세에 몰리는 모양새다. SMBC닛코증권은 도쿄올림픽과 패럴림픽 개최가 중단될 경우 일본이 약 7조8,000억엔(한화 약 88조원)에 달하는 경제 손실을 입을 것이라고 최근 예측했다. 올림픽 중단은 정치적으로도 아베 내각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20일 3국 외교 장관 첫 화상회의에서 ‘완전한 형태의 도쿄올림픽 개최에 대한 지지’라는 의제를 먼저 꺼낸 것도 일본 측이었다는 후문이다. 모테기 외무상은 회의 직후 자국 기자들에게 “‘완전한 형태의’ 도쿄 올림픽을 실시하겠다고 했고 한국과 중국의 지지를 받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한 정부 소식통은 “코로나19 극복이 회의의 주요 주제인데도 일본 측만 올림픽에 중점을 뒀다고 들었다”며 “일본의 관심사다 보니 한국과 중국도 원론적인 의미에서 지지한다고 답변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일본은 한국의 관심사인 입국제한 조치 완화·해제에 관해서는 상대적으로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분위기다. 일본 요미우리 신문은 앞서 지난 20일 일본 정부가 한국과 중국에 대한 입국제한 조치를 2주~1달가량 연장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다. 모테기 외무상은 이에 대해 “한·중·일 3국은 각각 취하고 있는 대책에 대해 신중하고 적절하다는 데 의견 일치를 봤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의 입국제한 조치에 한국과 중국 외교 장관이 “적절하다”고 동의한 것처럼 알린 셈이다. 강 장관이 “교류·협력 위축을 최소화하도록 노력하자”고 강조했다는 우리 외교부 발표와는 완전히 상충되는 해석이었다.
국제연대 늘려 책임 피하려는 중국
한·중·일 3국 간 방역협력을 처음부터 가장 원했던 국가는 의외로 중국이었다. 그것도 코로나19가 심각하게 확산될 때가 아니라 거꾸로 상황이 호전된 다음부터 자신감을 갖고 보건 협력을 요구하기 시작했다는 게 복수 당국자의 전언이다.
한 외교부 당국자는 “3국 방역협력에 대해 중국은 처음부터 ‘어떤 수준이라도 좋으니 하자’는 적극적인 입장이었고 한국은 ‘못할 건 없다’는 정도의 입장이었다”고 설명했다.
중국이 한·중·일 협력을 강화하려는 의도는 최근 시진핑 국가주석과 중국 매체 등이 유독 강조하는 ‘인류운명공동체’라는 말에 그 힌트가 숨어 있다는 분석이다. 국제 방역 협력 확대는 코로나19에 대한 인식을 전 인류의 문제로 돌리고 중국 책임론을 불식시키려는 전략 중 하나라는 것이다.
20일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에 따르면 시 주석은 19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도 “각국과 함께 인류운명공동체 이념에 따라 국제 방제 협력을 강화하겠다”며 “합동 연구를 추진하고 공동의 위협과 도전에 대응해 전세계 공중위생의 안전을 지킬 것”이라고 밝혔다. 중국이 감염병 확산 저지를 위해 세계 최전선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국가임을 강조한 또 다른 단면이다. 중국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등 미국 정부와도 코로나19 책임을 두고 연일 설전을 벌이고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회복 국면에 들어선 뒤부터는 세계 각국의 진단 노하우 협조 요청에 적극 협력 의사를 밝히면서 국제적 영향력도 과시하고 있다. 진단 관련 협조를 받기 위해 중국을 찾는 국가 수는 한국 못지 않게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정부 소식통은 “중국 정부에 각국의 진단 관련 협조 요청이 쇄도하는 건 사실”며 “한국에 협조 요청을 하면서 이미 중국에서 도움을 받았다고 밝히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고 귀띔했다.
일각에서는 중국 역시 협력이라는 명분만 강조하면서 우리의 관심사인 입국제한 조치 해제 문제에 대해선 방관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중국 정부는 이달 20일부터 수도인 베이징으로 들어오는 모든 국제선 항공기의 착륙을 금지하고 톈진 등 인근 지역 공항에서 방역 절차를 먼저 거치게끔 했다. 증상이 없는 사람만 베이징에 출입시키겠다는 강화된 규제다. 어느 나라보다 기업인 예외 조치를 강하게 주장해 온 한국 입장에서는 대중 무역 회생에 대한 기대도 그만큼 꺾이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