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유럽은 페스트로 고통받았지만 그 계기로 찬란한 르네상스 시대를 맞았다. 전화위복이라는 말처럼 재난과 불행을 지렛대 삼아 새로운 가능성이 펼쳐지기도 한다.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로 행사를 취소해야만 했던 아트바젤(Art Basel)의 온라인 뷰잉룸이 그 사례 중 하나다. 미술품은 현장에서 직접 관람해 작품과 공명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랜선 고객’을 발견한 것이다.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로 아시아 최대규모의 미술 장터인 아트바젤 홍콩(Art Basel HK)은 개최 40여 일을 앞둔 지난달 초 ‘행사 취소’를 선언했다. 닷새 남짓한 행사 기간에 1조원의 판매고를 올리는 행사다. 대신 온라인 전시장 격인 ‘뷰잉룸’을 18일 VIP프리뷰를 시작으로 25일까지 운영하기로 했다. 유럽중앙 표준시간으로 오전 11시 VIP고객을 위해 우선 공개된 뷰잉룸에는 시작부터 예상 외로 많은 접속자가 몰려들었다. 25분간 서버가 다운됐을 정도다. 세계 최정상급 화랑 중 하나인 데이비드 즈워너는 첫날 오전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여성화가 마를렌 뒤마의 260만 달러짜리 그림을 미국 고객에게 판매한 것으로 알려졌다. 벨기에 화가 뤽 투이만의 작품도 200만 달러에 팔리는 등 순항을 시작했다. 가고시안갤러리도 온라인 선공개 30분 만에 추상화와 네온을 결합한 메리 웨더포드의 작품을 75만 달러에 판매했다.
‘랜선 고객’의 가능성이 열린 이번 아트페어에 초청된 국내 화랑들도 적극적이다. 국제갤러리는 국가대표급 작가 이우환을 비롯해 하종현, 우고 론디노네 등 전속작가들의 작품을 대거 출품했다. ‘뷰잉룸’은 판매된 작품에 대해 추가 문의가 이어지는 혼란을 막기 위해 거래완료 후에는 게시를 중단한다. 아트페어에서 팔린 작품을 전시장에서 떼어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작품의 실제 크기를 가늠하기 위해 동일한 크기의 벤치를 앞에 놓고 사진을 촬영하게 한 점도 눈길을 끈다.
부산의 조현화랑은 원로화가 박서보의 개인전 형식으로 ‘묘법’ 연작을 선보였다. 페로탱과 화이트큐브갤러리 등도 박서보 작품을 소개했지만 조현화랑은 30년간 작가와 쌓은 인연을 기반으로 구작부터 근작까지 다양한 작품들로 경쟁력을 보이는 중이다. 화랑 관계자는 “오프라인에서는 한국, 그것도 서울이 아닌 부산의 화랑이라는 점이 한계로 작용할 수 있지만 온라인으로는 국경과 지역의 한계를 넘어 작품 자체로 승부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구에 본점을 둔 리안갤러리는 ‘미니멀 아방가르드’라는 전시제목으로 백남준·이건용·윤희·남춘모·이미 크뇌벨 등 국내외 작가를 선보이고 있으며, 학고재갤러리는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한국작가’로 곽인식·백남준·김구림·윤석남·이동엽·김호득·강요배·정현·김현식을 선보인다. 용산구 이태원의 신생화랑 P21은 젊은작가 정희민의 개인전으로 참여해 신선함을 앞세웠다. 갤러리바톤은 시·소설·신문 등의 글을 진주알이나 보석 등으로 치환해 새기는 고산금의 개인전 형식으로 꾸몄다.
이번 전시에 대한 미술계의 반응은 일단 긍정적이다. 다만 실제 작품을 보지 않고 거래하는 것이라 작품성보다 작가의 명성이 더 크게 작용하는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제기된다. 온라인 전시장에 가격정보를 명시하는 데 대해서도 “투명성을 높이고 고객 접근성을 돕는다”는 의견과 “가격 정보가 노출되면 유사 작품을 더 낮은 가격에 공급하는 딜러가 생겨날 수 있어 시장 혼란이 우려된다”는 입장이 엇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