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로터리] 21세기 '정조의 꿈' 프로젝트

김경규 농촌진흥청장




경기도 수원 화성의 서장대에서 서쪽을 내려다보면 호수가 하나 보인다. 화성 축조 당시 정조가 개인 재산인 내탕금 3만냥을 들여 축만제(祝萬堤)를 쌓아 만든 농업용 저수지 ‘서호(西湖)’다. 주변의 지명인 서둔동(西屯洞)은 화성의 서쪽에 위치한 둔전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일제강점기 권업모범장과 광복 후 중앙농사시험장을 거쳐 농촌진흥청이 있었던 곳으로 우리나라 농업연구의 산실이다. 농촌진흥청은 지난 2014년 전북혁신도시로 이전했지만 지금도 서호와 둔전을 작물연구시설로 이용하고 있다.

서양에서 산업혁명이 한창일 때 재위한 정조는 청나라로부터 유입되는 서양의 최신기술에 관심이 많았다. 즉위 원년 설치한 규장각에 동서양의 8만여책을 수집하고 출신을 막론하고 젊고 유능한 인재를 각신(閣臣)에 등용해 연구에 전념하게 했다. 정조의 내심은 탕평책과 금난전권의 혁파와 같은 자신의 혁신적 구상들을 실행할 인재의 양성이었던 것 같다. 화성 건축을 위해 정약용이 정조에게 보고한 축성 기획서인 성설(城說)이나 상세설계서인 각종 도설(圖說)에 명확히 드러나 있다고 한다.


자급형 혁신도시를 꿈꾸며 화성을 완공한 정조가 정약용을 포함한 중농주의 실학자들에게 주문할 다음 계획은 무엇이었을까. 아쉽게도 화성의 완공 직후 정조의 사망으로 그의 혁신적 시도는 거기서 멈추었으니 알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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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간 서둔동에 국립농업박물관이 들어선다. 농업기술의 역사가 깃든 곳에 농업유산을 전시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으로 매우 뜻깊은 일이다. 이에 더해 박물관과 축만제를 연계한 혁신적인 첨단 농업연구시설의 설치를 구상하고 있다. 외부환경의 영향을 최소화하면서도 광합성의 효율을 높일 수 있는 인공광과 지열·태양열 등 재생에너지를 활용하는 시설이 될 것이다. 둔전에 쓰이던 서호의 물을 정화해 작물을 재배하는 양액과 시설의 냉각수로 사용할 수 있다. 작물의 생육환경을 디지털 기술로 자동 제어하며 사계절 생산이 가능한 최첨단의 농업시설이 될 것이다. 양액으로 사용한 물은 위생적으로 정화해 물고기도 기를 수 있다. 정조가 야외에 설치한 둔전을 건물 내 첨단 농사시설로 발전시킨 개념의 에너지 자립 ‘둔방형(屯房形) 빌딩농장’이다. 농업박물관과 연계해 첨단 농업기술을 전시하고 정조가 관료와 군인들에게 땅의 경작권을 부여했듯이 스타트업의 연구개발과 생산을 실증할 수 있는 시설로 활용되는 것이다.

그로부터 220년이 지난 지금 정조가 꿈꾸던 농업혁신을 첨단 농업시설로 구현할 계획에는 가능성이 높은 실행방안이 마련돼야 한다. 유적의 원형이 훼손되지 않도록 농촌진흥청이 이전하면서 쓰이지 않게 된 기존 건축 부지를 활용하면 유적지 보호 문제는 해소할 수 있다. 국민의 절반이 사는 수도권에 농업의 미래를 보여주고 체험하는 최첨단 도시형 농업시설을 설치하는 일이다. 기술 전시는 물론 연구와 생산을 함께할 수 있는 혁신적인 공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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