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들이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발행의 실리와 위험을 따지며 고심을 거듭하는 사이 케냐, 캄보디아, 우루과이 등 신흥국들이 선도적으로 디지털 화폐 실험에 나서고 있다. 케냐는 휴대폰을 기반으로 한 결제 서비스를 거의 전국민에게 보급했고, 캄보디아는 연내에 중국을 제치고 CBDC를 최초로 공식 발행하는 나라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여기에 더해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사태 여파로 전세계적으로 ‘비대면 거래’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이를 구현할 수 있는 중앙은행 및 민간발행 디지털화폐 사업에 신흥국들이 한층 더 가속을 붙일 전망이다.
그 중에서도 케냐는 가장 선도적이고 성공적인 국가 사례로 꼽힌다. 현지 최대 통신사인 사파리콤이 지난 2007년 구축한 디지털결제·송금 서비스 ‘엠페사(M-PESA)’가 안착해 현지 국민 10명당 약 9명이 현금 대신 쓰고 있다. 케냐의 1인당 국민소득은 2,000달러대에 불과하지만 약 2,300만명의 현지인들이 매일 평균 3,000만건에 달하는 결제를 엠파사를 통해 처리하면서 전세계에서 가장 빨리 디지털경제 혁신을 이룬 나라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이런 가운데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이용수요가 한층 더 늘게 됐다. 주요 외신들에 따르면 최근 사파리콤은 코로나19 확산에 대응하기 위해 국민들이 외출 자제를 요청한 케냐 정부의 정책에 발 맞춰 10달러 이하 소액 거래에 대해선 90일간 엠페사 이용 수수료를 면제해주기로 했다.
엠페사의 큰 특징은 은행 계좌를 개설하지 않고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휴대전화의 SIM카드를 통해 이용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은행에 방문해 신분증을 제시하지 않고도 돈을 예금하거나 인출·송금할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엠페사를 민간발행 디지털화폐의 일종인 ‘전자화폐’로 분류했다.
동남아에선 중앙은행 차원에서 법정화폐의 디지털화가 추진되고 있다. 캄보디아 국영은행(NBC)가 주인공이다. NBC는 자국의 CBDC 개발사업을 ‘바콩(Bakong)’으로 명명하고 최근 CBDC발행 준비를 마쳤다. 향후 수개월내 정식 출시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해당 CBDC가 출시되면 현지 국민들은 시중은행 계좌와 연동되는 전자지갑 앱인 일명 ‘바콩 월렛’을 스마트폰을 비롯한 이동통신기기에 설치한 뒤 CBDC를 실생활의 결제활동에 이용할 수 있게 된다. NBC는 바콩 플랫폼으로 국가간 송금 서비스 등도 구현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신흥국들이 CBDC 등 디지털화폐 도입과 확산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은 기존 금융인프라에 대한 국민들의 접근성이 떨어지는 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다. 특히 저개발국일수록 은행, 자동현금인출기(ATM)를 비롯한 금융인프라가 부족하기 때문에 스마트폰에 앱만 깔면 어디서든 돈을 송금·결제할 수 있는 모바일 기반의 디지털화폐가 대안으로 각광 받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 금융인프라 측면에선 선진국을 따라잡기 힘든 만큼 디지털을 활용한 대안서비스로 경제혁신을 이루려는 정책목표도 함께 녹아 있다. 박선종 숭실대 법학과 교수는 “아프리카 많은 나라들이 기술 발전을 이용해 유선 전화 시대를 건너뛰고 무선 휴대폰으로 넘어 갔듯이 신흥국들이 은행을 기반으로 한 금융시스템을 배제하거나 축소하고, 디지털 화폐를 도입해 금융과 경제의 도약을 동시에 이루겠다는 목표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남미에선 우루과이 중앙은행이 가세했다. 화폐 제조와 유통 비용 절감, 탈세 및 자금 세탁 방지 등의 목적으로 2017년 11월부터 6개월간 디지털 화폐 ‘e-페소 (e-Peso)’를 시범 발행했다. 우루과이 중앙은행은 국영 이동통신사의 개입과 기업 고객 1만명을 상대로 e-Peso 계좌를 개설하고, 소액 결제와 송금 등에 사용한 결과가 ‘긍정적’이라고 판단했다. IMF는 이에 따라 5년 내 신흥국들을 중심으로 CBDC 발행이 잇따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신흥국 중앙은행들은 불안정한 통화가치를 안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도 CBDC 발행을 눈여겨보고 있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와 같이 글로벌 경기가 휘청일 때마다 자국 통화 가치가 급락해 현지 국민들조차도 자국 통화의 보유 및 사용을 기피하고 대신 미국 달러를 선호하자 CBDC를 통해 해법을 모색하려는 것이다. 신흥국들은 특히 안전자산 및 기축통화 등과 연동해 가치 급등락 위험을 낮춘 ‘스테이블코인’ 형태로 CBDC를 발행하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실제 지난 2018년 아르헨티나는 구제금융 요청으로 페소화 가치가 급락하자 중앙은행이 비트코인과 현금을 즉시 교환할 수 있게 규제를 완화해 인플레이션에 대응한 바 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신흥국들은 달러 가치에 따라 각국 통화가치 변동이 크기 때문에 자신들의 통화정책만으로는 달러 유출을 막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다”면서 “변동성을 낮추기 위해 신흥국 중앙은행들은 CBDC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손철·김기혁기자 runiro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