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한 업체가 성인 4,000여명을 대상으로 ‘해외 이민’에 대해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60%가 이민을 가고 싶다고 답했다. 가고 싶은 국가로는 미국과 캐나다 등 북미가 1위를 차지했으며 호주 등 태평양이 2위, 북유럽과 서유럽이 3~4위를 차지했다. 실제 해외이주자 통계도 이와 유사해 지난 2018년의 해외이주자 절반은 미국을 선택했다.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많은 아시아인은 유럽과 북미 등 서구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다. 보다 완벽하고 투명한 시스템과 인권과 생명에 대한 높은 존중, 다양성과 자유에 기반한 개인주의, 여유로운 삶의 방식까지 갖췄을 것이라는 환상이다. 드라마와 소설 속 주인공들이 새로운 삶을 찾겠다며 유럽이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것도 시청자와 독자가 이런 환상을 가졌기 때문일 테다.
하지만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나타난 모습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시스템 부재와 인권 경시, 개인주의가 아닌 이기주의, 열악한 의료환경을 쉽게 발견할 수 있어서다. 미국에서는 코로나19를 노인을 없앤다는 의미의 ‘부머 리무버’로 불렀다. 텍사스주 부지사는 경제와 70세 이상 노인의 생명을 비교하며, 경제에 손해를 끼치기보다는 죽는 것이 나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스페인에서는 노인들이 요양원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됐다. 이탈리아에서는 병의 중증도가 아니라 나이를 기준으로 치료대상을 선별하는 일이 벌어졌다. 프랑스에서는 술집 등의 영업정지가 시작되기 직전 수백 명이 길거리로 뛰쳐나와 술자리를 갖는 모습이 목격됐다. 재선을 앞두고 다급해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코로나19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전파하거나 아시아인들에게 책임을 돌리며 차별을 조장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물론 이를 이유로 한국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소위 ‘국뽕’에 빠지자는 것은 아니다. 한국 정부가 코로나19를 대처해온 과정에서도 아쉬움은 있다. 국내에서도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코로나19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인류의 비극을 국뽕의 계기로 삼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을 테다. 다만 그간 우리가 가졌던 서구에 대한 그릇된 환상으로부터, 한국을 무조건 비하하며 ‘헬조선’이라 치부하던 자조감으로부터 벗어나는 계기 정도는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