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회사채 시장을 녹이기 위한 채권시장안정펀드가 2일 공식 출범했지만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내려지지 않아 첫날부터 혼선을 빚었다. ‘돈맥경화’에 시달리는 증권사들의 기업어음(CP)은 매입 대상에서 제외되고 여신전문금융회사채권(여전채) 매입을 둘러싸고도 혼란이 일었다. 이날 최고 등급인 A1 등급의 CP 금리는 전날 대비 0.02%포인트 오르며 11거래일 연속 상승세를 이어갔다.
◇‘급한 불’ 증권사 CP는 제외되고 여전채는 늦어져=금융권에 따르면 채안펀드 운용사는 전날 카드·캐피털 회사와 여전채 발행 물량, 만기, 금리 등을 논의했으나 전격적으로 보류 결정을 내렸다. 발행금리가 문제였다. 민간채권평가회사 평균금리 수준에서 발행하려 했으나 펀드 출자자 측에서 시장보다 낮은 금리의 발행에 대해 제동을 건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경쟁입찰방식으로 바꿔 다음 주에 여전채 매입이 이뤄질 예정이다.
여전업계의 한 관계자는 “1일부터 여전사도 기존 대출만기를 연장한 상황에서 여전채 발행으로 조달마저 막히면 중소형사 위주로 유동성 위기가 올 수 있다”며 “중소형사는 채안펀드 가동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지연돼 상당한 부담을 느끼는 상황”이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카드·캐피털사 등 여전업체는 예금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여전채를 발행해 돈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경기가 급랭하면서 여전업부터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면서 여전채에 대한 수요가 뚝 떨어진 상황이다.
증권사 CP가 매입 대상에서 사실상 제외된 점도 도마에 오르고 있다. 운용지침상 명시적으로 증권사 CP를 제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 기업들의 단기자금 수혈을 우선순위에 두다 보니 증권사 CP는 매입 범위에서 밀려났다. 채안펀드 운용사 관계자는 “증권사 CP 매입을 하지 말라는 지침은 없다”면서도 “실물경제에 자금을 투입하자는 취지에 따라 실수요 CP 매입을 우선하다 보니 증권사 CP 매입이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채안펀드의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다. 한 투자자문사 대표는 “꽉 막힌 단기 자금시장의 문제를 신속하게 진압하기 위해서는 증권사의 유동화 ABCP를 포함한 CP를 대규모로 사들여야 한다”며 “소극적인 집행으로 자금시장 불안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소방수라더니…너무 몸 사려 효과 의문=회사채 매입 대상도 과거와 비교하면 보수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시장은 당초 채안펀드의 매입 대상을 투자적격 등급인 BBB급 이상으로 예상했다. 과거 2008년 채안펀드 투자 대상을 보면 신용등급 BBB+이상의 금융채·회사채·여신전문회사할부채·프라이머리채권담보부증권(P-CBO) 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는 AA급 이상으로 투자 대상을 좁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따른 기업 펀더멘털 우려가 컸다. 민간자금이 80%가 들어간 펀드인 만큼 부실 우려가 있는 기업에는 투자할 수 없고 그 이하 등급은 P-CBO를 통해 소화한다는 게 정책 기조지만 금융위기 때보다 심각한 위기국면에서 그때만큼의 매입은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올해 만기가 도래하는 A등급 이하 회사채는 8조2,580억원 규모다. 당장 4월에만 1조5,690억원이 돌아와 이들 회사채 차환에 비상이 걸렸다. SK렌터카(300억원), 아주산업(250억원), SK건설(560억원), 하이트진로(1,430억원), 한화갤러리아(200억원), SK머티리얼즈(2,000억원), 한미약품(500억원) 등이다. BBB등급의 폴라리스쉬핑(300억원), 한솔테크닉스(300억원), 대한항공(2,400억원)도 있다. CP 역시 2008년에는 제외됐으나 이번에 매입 대상으로 포함한 것은 긍정적이지만 대상을 A1으로 최상위 등급으로 한정해 한계라는 지적이다.
채안펀드가 기대에 못 미치자 ‘지원 1호’가 될 것으로 예상되던 롯데푸드는 발행 규모를 당초 2,000억원에서 700억원으로 대폭 줄였다.
/이혜진·이태규·이지윤·김민경기자 classic@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