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지출 감축과 자유무역 확대, 교회 재산 처분, 담뱃세와 (악명 높은) 소금세의 균등화, 토지세 신설.’ 1786년 가을, 프랑스 재무총감 샤를알렉상드르 드칼론이 제시한 경제개혁안의 골자다. 칼론은 이 방안이 실행될 것이라고 믿었다. 확신의 이유는 두 가지. 첫째, 재정 여건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나빴다. ‘어렵지만 흑자 상태’라는 전임자의 재정보고서를 믿을 수 없어 직접 조사하니 놀라운 추정치가 나왔다. 연간 세입 4억7,500만리브르에 지출은 5억8,700만리브르. 연 1억1,200만리브르씩 적자가 쌓였다.
개혁안 통과를 믿었던 두 번째 이유는 자신도 귀족이었다는 점. 중농주의 경제학자 출신인 튀르고나 은행 경영으로 큰돈을 벌었던 네케르 등 전임 재정총감과는 달리 백작가문 출신이었다. 귀족의회 격인 명사회와 법률 심사권을 갖고 있는 파리고등법원도 자신을 이해할 것이라고 여겼다. 현실은 기대와 반대였다. 개혁안을 뭉갰을 뿐 아니라 약점을 들추려 뒤를 캤다. 1787년 4월8일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는 결국 그를 파면하고 유배령을 내렸다. 칼론은 영국으로 도망치고 프랑스의 세제개혁도 물 건너갔다.
앙시앵레짐(ancien regime·구체제)에 안주했던 성직자(제1신분)와 귀족(제2신분)은 기득권 옹위에만 매달렸다. 프랑스의 당시 인구 2,700만명 가운데 제1신분은 10만명 남짓했으나 나라 땅의 10%를 소유했다. 40만명 정도인 제2신분도 국토의 20%를 가졌다. 막대한 땅을 가진 제1·2신분은 세금을 내지 않으며 부를 굴린 반면 민중은 중과세에 시달리고 식량난에 굶어 죽었다. 인구의 4분의3 이상이던 농민들은 제세와 교회에 내는 십일조세, 인두세, 소득세뿐 아니라 반강제적 간접세인 소금세 납부 부담에 짓눌렸다.
자신도 귀족이었으나 ‘교회와 귀족의 재산에 과세하자’던 칼론의 개혁안이 물거품으로 부서진 지 3년 만에 프랑스는 대혁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혁명 분위기 속에서 수많은 귀족의 목이 잘렸다. 만약 프랑스가 칼론의 개혁을 수용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문제는 역사의 반복 가능성이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에 따르면 오늘날 상속자본의 힘은 18세기 대혁명 전야와 비슷하다. 한국은 더 하다. 미국과 더불어 부의 편중이 가장 심한 나라로 꼽히건만 개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직접세 비중을 올리면 가짜 뉴스에 홀렸는지 빈민마저 분노하니까.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