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가격리가 건국신화에 나오는 나라입니다. 조금만 더 참아봅시다!”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확산된 이 글을 보고 한참을 웃었다. 우리는 이미 반만년 전에 동굴로 들어가 100일 동안 마늘과 쑥을 먹으며 참고 기다린 웅녀의 자손이라고, ‘못 참겠다’며 뛰쳐나간 호랑이의 후손과는 다르다고. 익숙한 고조선의 단군신화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속에서 한국인의 해학과 골계미를 새삼 끄집어내고 있다. 늘고 있는 확진자 수와 신천지로 인한 대규모 확산을 두고 “소파-냉장고-침대를 반복적으로 오간 ‘확찐자’의 동선과 ‘살천지’의 폐단”을 얘기할 수 있는 호탕함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중순 이탈리아 전역에 보름간 이동제한령이 내려지자 집안에 갇힌 이탈리아 사람들은 오페라 배우처럼 발코니로 나와 번갈아 노래를 하거나 식기를 두드리는 식으로 유쾌하게 전염병과 ‘싸웠다’. 외롭게 격리됐다는 우울감을 떨치기 위한 노력 앞에 ‘역시 이탤리언!’이라는 박수갈채가 뒤따랐다.
코로나19로 무기한 휴관에 돌입한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게티미술관은 지난달 26일 SNS 계정을 통해 ‘좋아하는 작품을 골라, 집에 있는 물건 세 가지를 활용해, 작품을 재창조’하는 명작 패러디 챌린지를 제안했다. 연간 200만명에 달하는 관람객을 받지 못하게 된 게티미술관이 위기에 대응하는 방식이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미국 농가의 부부를 그린 것 같은 그랜트 우드의 ‘아메리칸 고딕’이나 멕시코 국민화가 프리다 칼로의 화려한 꽃장식과 일(一)자 눈썹이 강조된 ‘자화상’,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가 그린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등의 유명한 인물화를 숱한 사람들이 재창조해내며 유쾌함을 공유했다. 욕실에서 쪽지를 든 채 암살당한 주인공을 그린 19세기 고전주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을 패러디한 장면에서는 쪽지 대신 휴대폰이 손에 들려 있는가 하면 잭슨 폴록의 물감을 흩뿌린 추상화를 실이나 식재료 등을 이용해 재구성하는 기발한 경우도 눈길을 끌었다.
위기 때 본색이 드러난다. 싸우는 방식을 보면 그 사람의 본성을 알 수 있듯, 위기대처의 방식에서 문화·문명적 배경이 드러나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선언 이후 코로나19의 확산 속도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중국이 지난해 말 WHO에 후베이성 우한을 중심으로 정체불명의 폐렴 발생을 보고한 지 100일 만에, 곰이 웅녀가 될 만큼의 시간 동안 전 세계 누적 확진자 수는 150만명을 넘어섰고 사망자도 8만7,700여명에 이르렀다. 혼란과 공포에 사로잡히기 쉽지만 호통치고 분노한다고 나아지지는 않는다. 위기 앞에 민첩하게 대응하고 이성적으로 해결하되, 마음과 삶까지 빼앗기지는 말지어다. 눈부신 봄날 ‘집콕’하는 신세를 한탄하고 ‘코로나블루’를 호소할 게 아니라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긍정적으로 들여다보자. 14세기 흑사병 이후에 르네상스가 열렸고 세계대전의 폐허 위에서 바우하우스의 디자인혁명이 태어났음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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