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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십자군, 콘스탄티노플 약탈

1204년 십자군, 타락의 길로

1204년 콘스탄티노플 약탈. /위키피디아1204년 콘스탄티노플 약탈. /위키피디아



1204년 4월13일 아침 콘스탄티노플. 이틀 전 성벽을 넘은 프랑스 귀족들과 베네치아 연합 십자군이 시내로 들어왔다. 비잔틴(동로마) 제국의 황제는 도망치고 군대도 무너진 터.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기 전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같은 기독교인을 공격하지 말라’는 긴급 전갈을 보냈으나 소용없었다. 십자군은 ‘같은 기독교인’을 죽이고 욕보였다. 성서와 십자가를 흔드는 사제들을 찌르고 일반 여성은 물론 수녀들까지 능욕했다. 함락 후 프랑스인이 제위에 올라 제국의 명맥도 끊겼다. 백성들은 로마 가톨릭에 따르라고 강요받았다.


비잔틴제국은 57년이 지나서야 나라를 되찾았지만 세계에서 가장 부유했다는 명성은 회복하지 못했다. 십자군에 탈탈 털렸던 탓이다. 오죽하면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오스만튀르크가 십자군보다는 자비로웠다는 기록까지 남았을까. 십자군이 ‘같은 기독교도’를 살해하고 재산을 뺏은 이유는 간단하다. 돈. 교황의 4차 십자군 소집 요구에 전비 부담을 느낀 유럽의 각국 국왕들은 불응했으나 프랑스의 일부 귀족들이 배후인 이집트를 먼저 점령한 후 예루살렘을 치겠다고 나섰다. 문제는 수송 수단. 제노바와 베네치아가 합쳐도 배가 부족할 판에 제노바는 수송을 거부한 상황. 베네치아가 혼자 조건부로 떠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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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8만4,000마르크를 내면 기사 4,500명에 말과 종자 9,000명, 보병 2만명을 수송하고 정복지의 절반을 준다면 완전무장한 갤리선 50척과 병력 1만명을 제공한다는 조건을 십자군은 기쁘게 받아들였다. 정작 베네치아에 모인 프랑스 병력은 예상의 절반에도 못 미치고 귀족들이 거둔 돈도 모자랐다. 막대한 전함 건조 비용을 들인 베네치아는 완납이 아니면 출항 불가라며 식량 공급까지 끊었다. 다급해진 십자군은 체면도, 명분도 다 버렸다. 베네치아의 요구에 따라 기독교 국가인 헝가리의 항구 자라를 공격해 교황에게 ‘십자군 전원 파문령’까지 받았다.

파문령에 주춤하던 십자군에 유혹이 더 찾아왔다. 비잔틴제국의 전 황태자가 찾아와 황위를 찬탈한 삼촌을 내쫓아주면 ‘성공불 20만마르크와 병력 1만명 지원, 로마 가톨릭으로의 복속’ 등을 약속해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넘었다. 황제가 된 황태자가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암살되자 십자군은 도시와 제국을 완전히 빼앗았다. 돈에 찌들어 명분을 저버린 십자군의 만행은 옛 얘기가 아니다. 그리스에서 십자군은 오늘날까지 악마로 통한다. 미국이 가끔 소집하는 ‘현대판 십자군’도 과도한 전비로 글로벌 경제난을 부채질한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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