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왕에게 양이를 강요하고 시모노세키에서는 서양상선을 포격하며 ‘정신승리’에 환호하던 조슈번은 교토 전투(금문의 변)에서 패배하고 서양열강의 보복공격을 받자 정신을 차렸다. 목에 칼이 들어오니 ‘정신승리’에 도취하고 있을 여지가 없었다. 금문의 변에서 궁궐에 총격을 가해 ‘조적(朝敵·조정의 역적)’으로 몰렸으니, 막부가 토벌하러 올 것은 불문가지였다.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1865년 초 적은 군사로 번 권력을 탈취한 다카스기 신사쿠는 대개혁을 선언했다. 골자는 부국강병이다. 양이를 하려면 강병이 있어야 하고 강병을 양성하려면 부국이 돼야 한다.
먼저 강병이다. 강한 군대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답은 뻔하다. 서양군대처럼 만들면 된다. 정치적·사회적 이유로 거부했을 뿐이다. 조슈는 즉각 서양진법을 채용해 서양식 군대를 육성하기 시작했다. 사무라이 사회에서 진법을 바꾸는 일은 조선에서 서원을 철폐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이어 서양식 무기를, 그것도 최신식을 대량 구입해 들였다. 당시 나가사키에는 서양무기 상인들이 들어와 있었다. 그중에서도 큰손은 영국 상인 토머스 글로버였다. 이 일에 활약한 사람 중 한 명이 이토 히로부미다. 조슈에 막대한 무기를 판 글로버는 훗날 “도쿠가와 막부의 반역자 중 내가 가장 큰 반역자일 것(글로버 사담속기록)”이라고 했다. 지금도 나가사키에는 그가 체류하던 저택이 글로버 정원이라는 대표적 명소로 남아 있다.
서양진법과 서양 최신무기로 사무라이뿐 아니라 평민까지 서양식 군대로 편성됐고 이들은 다카스기 휘하에 결집했다. 작지만 강한 군대다. 기도 다카요시는 당시 상황을 “숙연한 것이 심야와 같은 분위기(방장회천사 防長回天史)”라고 표현했다. 지금처럼 휘황찬란한 심야에 익숙한 도시인들은 감이 안 오겠지만 깊은 산 속 오밤중의 분위기를 상상해보시라. 계엄이다. 사쓰마와 조슈의 동맹을 성사시키려고 조슈에 잠입한 사카모토 료마는 그 상황을 보고는 “방방곡곡에 방벽을 치고 대로에는 남김없이 지뢰를 설치했다. 서양포술은 조슈가 제일인데, 숲이 조금만 있으면 야전포대를 만든다”며 “일본의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일(형·누나·유모에게 보낸 편지)”이라고 감탄했다.
이런 일에는 어마어마한 돈이 든다. 다카스기는 “나라를 경영하려면 부국강병이 우선이다. 성인께서도 먹는 게 족해야 군대가 있을 수 있고, 그래야 백성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하셨다. 성인이 지금 나타나신다고 해도 ‘국가경영, 국가경영’이라고 큰소리만 치고 비분강개하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강병은 부국에서 나온다. 그럼 어떻게 부국이 될 것인가. 농민들 세금 뜯어서 될 일이 아니다. 돈줄은 단 하나, 무역밖에 없다. 그런데 무역이라니? 이들은 양이론자가 아닌가. 서양과의 통상조약을 당장 파기하라고 한 자들이 아닌가. 교토에서 양이운동이 절정을 이루던 1862년 다카스기가 쓴 글을 보자. “지금의 형세로 봐서 우리 번의 물건을 팔기에는 오사카보다 나가사키가 낫다. (중략) 막부가 외국과의 통상을 허가할 때는 나가사키를 근거지로 해 여기서 물건을 선적해 광둥·딩하이와 홍콩, 나아가 영국의 런던, 미국의 워싱턴까지 진출해야 한다.”(이상 동행선생유문 東行先生遺文) 세계 무역론이다. 막부를 괴롭히기 위해 양이론을 가장했다고 비판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마침 조슈는 시모노세키라는 좋은 항구를 갖고 있었다. 이 항구는 한반도 교류의 입구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서양선박이 오사카로 향할 때 지나는 목구멍에 해당하는 곳이다. 조슈가 양이를 한답시고 서양상선을 포격한 곳도, 그 보복으로 포격을 당한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조슈번은 시모노세키를 개항해 서양무역에 뛰어들려고 했다. 오랫동안 양이를 부르짖었고, 불과 반 년 전에 서양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자의 ‘표변’이다. 사람 관계에서 표변을 좋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국가지도자급의 그것은 달리 봐야 한다. 표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때, 왔던 길을 고집하는 것이 지도자의 선택이 될 수는 없다. 변화무쌍한 시세를 통찰해 국가이익이 되는 쪽으로 표변을 감행하고 그에 따른 비난과 희생을 달게 받는 것이다. 착한 지도자는 필요 없다.
조슈는 국내 교역, 특히 사쓰마와의 무역에도 눈독을 들였다. 이 무역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이뤄지고 있었는데 8·18정변과 금문의 변으로 양자가 대립하면서 중단돼 있었다. 막부와의 전쟁을 목전에 둔 조슈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쓰마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경제협력은 외교회복을 위한 좋은 디딤돌이다. 과감하게도 조슈는 사쓰마에게 서양의 최신식 총포와 증기선 구입을 의뢰했다. 막부의 철저한 감시를 받는 조슈는 아무래도 활동에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쓰마에게도 리스크가 큰 비즈니스였다. 이를 사쓰마가 들어준다면 양측의 신뢰는 급속도로 회복될 것이었다. 이때 중재에 나선 이가 료마이고, 그 결정물이 1866년 초에 결성된 ‘삿초동맹(薩長同盟)’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자세히 다루겠다.
시모노세키에는 무역을 관장하는 월하방(越荷方)이라는 기구를 뒀는데 다이묘 개인의 돈으로 운영해 그 회계도 공식회계와는 따로 운영했다. 번 수뇌부가 그 수익을 특별한 곳에, 기존 규정의 제약 없이 쓰기 위한 것이다. 그건 다름 아닌 해군비 충당이었다. 다음으로 무육방(撫育方)이라는 기구를 설치해 돈이 되는 납(蠟), 기름, 종이, 철 같은 상품의 생산과 유통·판매를 관장하게 했다. 번 정부가 주도해 유력 산업을 키운 후 민간에게 불하하려는 계획으로 메이지 정부 초창기 경제정책과 비슷하다. 어쨌든 무역과 생산을 번 정부가 틀어쥐고 그 이익금을 해군을 비롯한 군사비에 쏟아붓기로 한 것, 조슈의 힘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막부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서양화에 의한 부국강병 없이 조슈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서양에 정통한 관료들이 속속 등용돼 맹렬하게 개혁을 추진했다. 조슈와 마찬가지로 군대를 서양식으로 편제하려고 시도했고(조슈만큼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서양에서 군함을 사들여 대규모 해군을 건설했다. 에도 근처에는 거대한 제철소를 건설했다. 그 후로 지금까지 제철소·조선소·군항으로 사용돼온 요코스카 제철소의 출발이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막대한 차관을 들여오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차관 도착보다 막부가 먼저 멸망했다. ‘시간과의 경쟁’에서 진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시기 막부와 반막부파의 싸움은 수구와 개혁의 싸움이 아니라는 점이다. 막부도 반막부파도 필사적으로 개혁에 나섰다. 누가 더 과감하게 철저하게 신속히 개혁하느냐의 싸움이었다. 이 싸움에서 개혁에 조금 미진했고, 조금 늦었던 막부가 무너졌다. 그러나 막부는 많은 개혁의 유산을 남겨놓았다. 잘 정비된 근대적인 관료기구와 유능한 관료, 서양에 정통한 지식인, 전문가, 요코스카 제철소 같은 산업기반, 그리고 서양국가와의 원만한 외교관계 등등이 그것이다. 덕분에 메이지 정부의 출발지는 맨땅은 아니었다. 막부가 남겨놓은 것들은 메이지 정부의 근대화 개혁에 큰 기반이 됐다.
그럼 막부는 왜 패했던 것일까. 문제는 정치적 리더십이었다. 페리 등장 이후 10여년간 이 중요한 시기에 두 명의 쇼군(이에사다·이에모치)이 재임했지만 정치력을 거의 발휘하지 못한 무능한 자들이었다. 1866년 말에 가서야 8년 전 쇼군 계승분쟁에서 밀려났던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쇼군이 되며 막부는 오랜만에 탁월한 정치능력을 가진 최고지도자를 갖게 됐다. 그러나 혈연적으로 방계 중 방계인 미토번 출신인데다 막부를 괴롭혀온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아들인 그에게 가신들은 충성을 다하지 않았다. 그도 재임 기간 중 한 번도 에도 땅을 밟지 않아 막부보다는 일왕에 더 충성한다는 가신들의 불신을 지우지 못했다. 에도에 있던 중소 다이묘 출신의 로주들이 막부 가신단을 하나로 묶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로주들 간의 권력투쟁도 심각했다.
이에 비해 조슈는 현명한 다이묘 밑에 유능한 반막부파 정치집단이 강력한 리더십을 구축했다. 에도와 번에 이중으로 존재하던 번 정부를 하나로 통일하고 각종 관료기구도 심플하게 정리했다. 정부 회의에서는 격렬한 토론이 보장됐다. 회의상황은 ‘설전’ ‘혈전’으로 묘사될 정도였다. 회의에서 신분 차는 상대화됐다. 신분이 높더라도 논파당한 주장은 채택되지 않았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그 회의가 다이묘가 임석한 ‘어전회의’였기 때문이다. 주군 앞에서는 다 같은 가신. 신분 차이가 갖는 의미는 약화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더 진전되면 메이지 시대의 ‘일군만민(一君萬民)’이다. 이렇게 구축된 간결한 체제에서 강력한 정치 리더십을 발휘한 오야붕(親分)이 바로 다카스기다. 근대역사학에서는 영웅을 논하면 촌티 취급을 받았다. 거대한 시대적 제약 앞에서 인간의 힘은 초라하게 보였다. 그러나 하늘이 쳐놓은 그물을 헤집고 어딘가에 구멍을 내 도약하는 개인의 힘, 영웅의 돌파력을 감지해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역사를 읽는 묘미다. 다카스기 신사쿠, 이 희대의 전략가는 그의 말대로 ‘세상을 뒤집어 놓고는(回天)’, 시 한 줄 남기고 유신 직전 사망했다. “별 재미없는 세상이지만 재미있게.”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