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12월14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키티호크. 형제는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있었다. 누가 비행기 조종간을 잡을 것인가. 그들은 동전을 던져 결정하기로 합의했다. 형인 윌버 라이트의 승리였다. 윌버는 나무와 천으로 만들어진 비행기 조종석으로 기어 올라가 엎드린 채 준비를 마쳤다. 이어서 동생 오빌 라이트는 비행기 엔진에 불을 붙인 후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비행기는 경사로에 설치된 철로를 따라 서서히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는 중력의 힘으로 40피트가량 가속한 후 공중으로 솟구쳤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오빌은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하지만 비행기는 3초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날아가다 엔진이 꺼졌고 곧바로 모래사장에 떨어져 처박혔다. 이것은 인류 최초의 동력 비행이었다.
하늘을 나는 것은 인류의 오랜 꿈이었다. 중력의 힘을 거스르는 방법에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공기보다 가벼운 기체를 이용할 수 있었다. 18세기 말 프랑스의 몽골피에 형제는 이를 이용한 열기구를 만들어 2㎞ 높이까지 날아오를 수 있었다. 또한 날개 모양을 적절하게 설계하면 맞바람의 힘을 이용해 떠오르는 힘, 즉 양력(揚力)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됐다. 19세기 말 독일의 발명가 오토 릴리엔탈은 이러한 원리를 바탕으로 무동력 글라이더를 만들어 250m 이상 비행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이렇듯 오랜 기간 축적된 이론적·경험적 지식은 라이트 형제 발명의 발판이 됐다. 윌버와 오빌의 비행기 ‘라이트 플라이어 1호’는 12마력 내연기관의 힘으로 상당한 거리를 비행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방향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도 있었다.
라이트 형제가 키티호크에서 성공을 거두고 11년이 지난 후 유럽에서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전쟁이라는 위기 상황은 여러 테크놀로지의 발달을 가속화한다. 윌버와 오빌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비행기 테크놀로지는 국방을 위해 동원될 운명이었다. 실제로 전쟁 기간 동안 비행기 기술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연합국과 추축국 양측은 모두 20만대 이상의 다양한 비행기를 제작해 무기로 활용했다. 비행기는 이렇게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한편으로는 지면에 발을 붙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근원적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기술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대상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머리 위로 폭탄을 투하할 수 있어 보자마자 방공호로 뛰어들어 숨어야만 하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어느 쪽이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정상적인 국가라면 비행기 테크놀로지를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가 됐다.
이는 서구 기술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떨어진 아시아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시아의 젊은이들 역시 서구의 비행기와 조종사를 동경하며 각자의 사정에 맞는 꿈을 키워갔다. 일본의 호리코시 지로(1903~1982)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라이트 형제의 첫 동력 비행이 성공한 해에 태어나 구미 국가들의 비행기 테크놀로지를 동경하며 자라났다. 그가 대학에 입학할 무렵 도쿄제국대에 항공공학과가 신설됐다. 수재였던 호리코시는 당연히 항공공학을 선택했고, 1927년 졸업 후에는 미쓰비시중공업에서 항공기 설계자로 근무했다. 당시 일본에서 항공공학 전공자는 군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세계에 전운이 짙게 감돌던 1940년에 호리코시는 일본 해군의 요청을 받아 새로운 경량급 전투기의 개발을 주도했다. 황기(皇紀) 2600년을 맞아 ‘영식(零式)’ 함상 전투기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 비행기는 뛰어난 성능으로 태평양 전장에서 큰 명성을 누렸다.
20세기 초 조선에서 비행기라는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매료된 또 한 명의 젊은이가 있었다. 한성의 의관 집안의 늦둥이로 태어난 안창남(1901~1930)은 “어린 시절 조선에 처음으로 모 외국인이 비행기를 타고 와서 경성 하늘에 장쾌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훗날 회고했다. 하지만 당시 식민지 조선에는 비행술을 배울 만한 곳이 없었다. 그가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저돌적인 성격의 젊은이였던 그는 비행사가 되기 위한 교육과정을 마치고, 1921년 봄 일본에서 처음으로 치러진 비행사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고국의 동포들에게 그의 활약은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안창남이 이듬해 ‘금강호’라는 이름의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자 여의도 백사장에는 수만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그의 비행 모습을 지켜봤다. 그중에는 앞으로 비행사 또는 비행기 설계자의 꿈을 꾸게 될 어린 학생들도 섞여 있었다.
이렇게 비행기는 세계 각국에서 재기 넘치는 청년들을 매혹시켰다. 그 덕분에 2차대전 이후 비행기는 더 빨리, 더 멀리, 더 많은 승객과 화물을 태우고 날 수 있게 됐다. 전쟁 기간 동안 제트 엔진 비행기가 실용화 단계에 도달했다. 내연기관으로 프로펠러를 돌려 추진력을 얻던 기존의 비행기와는 달리 제트 비행기는 빨아들인 공기를 압축해 연료를 연소시킨 후 만들어지는 고온의 가스를 내뿜는 방식이다. 제트 엔진은 장거리 비행시 연료 효율을 높여 2차대전 이후 본격적인 상업 항공 활동의 견인차가 됐다. 비행기의 성능이 좋아지고 북극 항로를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북반구의 이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하지만 해방 이후 한국인들은 여전히 비행기를 직접 마주할 일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1974년까지도 일간지에는 매일 주요 입국자와 출국자 명단이 실렸다. 대개는 해외 시찰을 가는 공무원이나 대학교수, 또는 긴요한 상담(商談)을 위한 무역회사 직원들이었다. 이후 1981년에 여권 발급 절차가 간소화되고, 1989년에 해외여행이 완전히 자유화되면서 비행기는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가 됐다.
한국인이 비행기를 접할 기회는 점차 늘어났지만 ‘국산’ 비행기에 대한 욕망은 충족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었다. 1922년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 당시 일부 식자들은 “새로운 형태의 비행기를 발명”한 것도 아닌데 수선을 피운다며 그 의미를 폄훼하기도 했다. 세계 기술에 뒤떨어진 조국의 현실에서 오는 욕구불만이었다. 해방 이후 남북이 대치하게 된 상황에서도 북한은 소련제 미그기를, 남한은 미국제 노스럽사의 전투기를 이용해 서로를 견제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1982년 한국 최초의 ‘국산 전투기’ 제공호가 실전 배치되자 언론은 이를 “자주국방 강화에 새로운 장을 여는 역사적 순간”이라고 평가했다. 비록 미국 제조업체의 라이선스를 통해 제작한 것이기는 해도 한국 항공 기술사에 중요한 디딤돌이 된 사건이었다. 1980년대 초중반 동네 문구점에서는 제공호 ‘프라모델’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1910년대 호리코시와 안창남이 초창기 비행기 조종사를 보며 꿈을 키웠다면, 1980년대 초등학생들은 고무동력기와 프라모델 조립을 통해 비행기에 대한 관심을 이어갔다.
1990년대 이후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출국하는 한국인의 숫자는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내국인 출국자의 수는 2010년의 1,248만명이었던 것이 2019년에는 무려 2,871만명에 달했다. 전 국민의 절반이 매년 한 번씩 비행기를 탄다고 봐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이는 한국이 이미 글로벌 연결망에 긴밀하게 편입돼 있음을 잘 보여준다. 지난 30년 동안 한국이 경제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문화적·정치적 측면에서도 주변 각국과 활발한 교류를 벌인 결과다. 그러던 것이 2020년 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맞아 상당수의 비행편이 끊기는 일이 발생했다. 코로나19 이후 항공 산업의 변화와 그것이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서울과기대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