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학교 1학년과 초등학교 5학년 자녀를 둔 주부 손인희(43)씨는 지난달 가족과 함께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봤다. 고가의 티켓 때문에 평소라면 4인 가족의 뮤지컬 관람은 엄두도 못 냈겠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공연을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집에서 편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오페라의 유령의 작곡가인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유튜브를 통해 공개한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덕이다. 손씨는 “좋은 공연이라는 것은 알지만 직접 공연을 보러 가기에는 아이들이 집중하기도 쉽지 않고 비용 부담도 큰 게 사실”이라며 “아이들도 내용을 다 이해하기는 어려웠겠지만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처음 경험하기에는 정말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고 만족해했다.
코로나 시대와 함께 막을 연 랜선 공연은 소수의 애호가들을 중심으로 굴러가던 공연 시장에 수많은 ‘입문자’를 만들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손씨 가족처럼 ‘거리두기’로 집에서 보낸 시간이 길어진 것을 계기 삼아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예술 장르를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처음 경험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국내에서 진행된 각종 공연 스트리밍 댓글 창에는 ‘코로나 덕분에 연극 팬이 됐다’ ‘다음에는 공연장에 가서 직접 보고 싶다’ 같은 소감이 잇따랐다. 코로나가 불러온 언택트 시대는 애호가 중심으로 소비되던 문화예술 시장의 지형을 완전히 바꿔놓을까.
■방구석 1열 접속, 기록 대행진
온라인 세상의 미덕은 ‘장벽 없음(borderless)’이다. 말로만 전해 듣던 해외 유명 작품을 클릭 몇 번으로, 그것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랜선 공연·전시의 매력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갈 곳 잃은 수많은 사람을 노트북과 스마트폰 앞으로 끌어모았다. 웨버가 지난달 17일(현지시간) 유튜브 채널 ‘더 쇼 머스트 고 온’에 48시간 동안 공개한 오페라의 유령 25주년 기념 공연 실황은 조회 수 1,000만뷰를 넘어서며 큰 화제를 모았다. 한국인 최초의 쇼팽 콩쿠르 우승자인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도이체그라모폰의 기획으로 진행한 40여분간의 온라인 공연은 실시간 시청 최대 4만8,000명, 조회 수 30만건을 기록했다. 지난 7일 페이스북을 통해 진행한 무관중 온라인 공연 역시 실시간 시청자 3,000명을 넘겼고 지금까지 조회 수는 4만건에 육박한다. 이 밖에도 베를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뉴욕 메트오페라, 영국 국립극장 등이 전 세계 관객을 위해 주요 작품을 무료로 온라인에 개방했다.
공연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최근 진행된 ‘수평의 축’ 전시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라이브로 진행했는데, 이 SNS 라이브에는 방송 50분 동안 3,000여명이 접속했다. ‘비대면’이라는 특성상 작품에 대해 궁금한 질문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어 현장을 찾았을 때보다 적극적으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는 평가가 많았다. SNS 라이브를 진행한 양옥금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는 “실시간 소통이어서 그때그때 날 것의 질문들이 많이 들어왔다”며 “미술은 어려워서 참관 자체를 안 하는 분들이 많은데, 이런 분들의 관심을 환기하고 신규 관람객으로 유입시킨 계기가 됐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평가했다.
■문화 지형 뉴 노멀? 일시적 무료 체험?
온라인 공연·전시가 예술과 대중과의 거리를 좁혔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지리적·시간적·경제적 제약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예술을 누릴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에 무료 공개된 작품들 대부분이 세계적인 명작이라는 점에서 입문의 좋은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문화 향유 계층의 확대’ ‘문화 격차의 완화’로 연결된다고 평가하기는 성급하다는 지적이 대부분이다. 원종원 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교수는 “어떤 예술 장르든 코로나19에 따른 스트리밍 관람은 해당 장르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시도는 되겠지만 이것이 ‘오리지널’을 찾는 사람의 확산으로 연결된다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지금은 애호가의 영역으로만 여겨졌던 콘텐츠가 무료 배포되면서 ‘맛보기 기회’가 늘어났을 뿐이라는 얘기다. 황장원 클래식 음악 평론가도 “명공연의 영상 몇 분을 봤다고 그 장르에 매력을 느끼기는 어렵다”며 “이번 스트리밍은 공연 중단의 아쉬움을 해소하는 정도였을 뿐 신규 클래식 관객 유입 효과가 그리 크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공연 기획사 관계자는 현 상황을 일시적인 ‘소프트웨어 무료 체험판’에 비유하며 “체험을 하고, 그 경험을 인증하고 나면 끝이다. 그것이 정품 구매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정부·문화계에 남겨진 과제는
‘준비 없이 열린 랜선 시대’를 기회로 삼으려는 노력이 그래서 중요하다. 문화예술계에서는 단순히 공연·전시를 온라인 송출하는 방식으로는 이미 다수의 질 높은 무료 콘텐츠를 경험한 소비자들의 관심을 붙잡아두지 못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것이 ‘유튜브 팬텀’의 성공을 마냥 웃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정부 지원금에 의존한 콘텐츠 무료 공개만으로는 지속 가능성이 떨어진다며 유통구조 혁신을 위한 플랫폼 개발과 유료화 모델 개발에 앞장서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원 교수는 “무료 체험이 다음의 소비로 이어지고 진정 그 문화를 즐기는 수준까지 연장되도록 할 중간 단계가 필요하다”며 매년 여름 전 세계 클래식 팬들이 몰려드는 영국의 BBC 프롬스를 예로 들었다. 1895년에 시작된 프롬스는 약 8주간 100개 이상의 공연에서 클래식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선보인다. 수준 높은 공연을 저렴하게 접할 수 있어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일반 관객들이 즐길 수 있는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원 교수는 “관심을 이어가고 예술 장르와 대중의 거리감을 좁힐 수 있는 체험·심화 단계의 콘텐츠가 계속 나와야 한다”며 “영상화·스트리밍 일색인 정부 및 관련 단체의 지원책도 바뀌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황 평론가 역시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예술의 대중화에 대한 논의가 깊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영상만으로는 장르에 익숙하지 않았던 이들이 팬이 되기에는 한계가 있다”며 “가령 살롱 음악회나 버스킹처럼 현장의 감흥을 대중이 경험할 수 있는 방식의 접근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