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기억연대(정의연)가 촉발한 ‘깜깜이’ 회계 문제가 다른 시민단체들로 번지고 있다. 기부금뿐만 아니라 국고보조금을 받고도 관련 금액을 축소하거나 누락하는 방식으로 부실 공시를 한 것이 확인된 것이다. 국고보조금은 세금으로 조성되기 때문에 불투명한 회계 관리는 시민단체들이 혈세를 유용한 것으로 의심받을 수 있어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18일 국세청 공익법인 공시에 따르면 시민단체들이 내놓은 결산자료에서 회계부실 의심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특히 시민단체들의 주먹구구식 회계는 기부금뿐만 아니라 국고보조금에서도 다수 확인되고 있다. 재단법인이나 사단법인 자격으로 활동하면서 정부로부터 각종 공익사업을 수주해 재정지원을 받으면서 해당 금액을 결산자료에 누락하거나 관련 금액을 축소하는 방식으로 공시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국고보조금 부실 공시는 정의연 사례로 확인됐다. 정의연은 전신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시절인 지난 2016년부터 4년 동안 여성가족부 등으로부터 약 13억4,000만원의 국고보조금을 받았지만 국세청 공시에는 5억3,800만원만 신고한 것이 알려졌다.
문제는 시민단체 전반에 정의연과 같은 부실한 회계 관리가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정의연과 같이 여가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은 한 단체의 경우 11개 사업을 수행하면서 지난해 약 12억원의 보조금 수혜를 입었지만 국세청 공시에서는 보조금 수익을 0원으로 기록했다. 정의연처럼 국고보조금 수혜 사실을 완전히 누락한 것이다. 비슷한 사례로 다른 경제 단체도 2018년 6억원의 보조금을 받아 사업을 했지만 연말 결산에서는 국가보조금을 받지 않았다고 작성했다.
국고보조금 회계 부실 공시는 여가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부처별로 살펴보면 정의연과 비슷한 사례가 수두룩하다. 환경부의 지원을 받아 2018년 4개 공익사업을 한 재단법인은 관련 금액 3억8,000만원을 국세청 운영성과표에서 전액 미공시했다. 다만 이 단체는 해당 내용을 다른 금액까지 포함해 일괄공시로 처리했다고 전해왔다. 지난해에는 행정안전부 사업에서 협동조합 관련 학술단체가, 통일부에서는 다른 단체가 각각 1억2,000만원과 1,300만원을 국고보조금으로 받았지만 연말 결산에서 누락했다. 재정정책에서 정확성을 가장 인정받는 부처인 기획재정부에서도 같은 문제는 발생했다. 기재부 지원으로 2018년 3,000만원을 받고 공익사업을 한 한 금융단체는 관련 내용을 국세청에 보고하지 않았다. 정부 부처별로 전수조사를 할 경우 유사한 사례는 무수히 많을 것으로 분석된다.
시민단체를 포함한 공익법인의 경우 국세청 연말 공시를 통해 국고보조금 내용을 표기해야 하지만 회계인력을 고용하기 힘든 현실적인 어려움 탓에 세부적으로 서류 작성을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일부 시민단체들은 의도적으로 회계를 부실 공시했다기보다는 국세청 연말 공시가 의무 사항인지 모르는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다수 시민단체들은 “정부 국고보조금통합관리시스템인 ‘e나라도움’에 관련 내용을 보고했다”며 “공시의무를 위반한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시민단체뿐만 아니라 사업 규모가 큰 공익법인에서도 국가보조금 회계 관리를 소홀히 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으로 중소기업기술혁신협회가 있다. 해당 협회는 2018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지원을 받아 클라우드 관련 사업으로 23억7,000만원을 지원받았다. 그런데 국세청 연말 공시에서는 18억8,000만원만 신고했다. 차이가 나는 약 5억원의 금액과 관련해 질문하자 중소기업기술혁신협회 관계자는 “클라우드 사업으로 23억7,000만원을 받아 22억7,700만원을 썼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제공한 금액과 협회가 실제 집행한 금액의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국세청 공시 사실과는 차이가 나는 것이다. 중소기업기술혁신협회의 경우 단순한 시민단체가 아니라 연 사업수익이 기부금과 정부보조금, 회원 회비를 합쳐 62억원에 달하는 대규모 공익법인으로서 회계 공시 오류에 대한 비판을 피하기 힘들 것으로 분석된다.
전문가들은 세무당국이 시민단체와 공익법인들의 자율적인 외부회계감사를 유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전규안 숭실대 회계학과 교수는 “정부보조금 수익이 발생하면 손익계산서에서 어떤 식으로든 기술해야 한다”며 “보조금을 엉뚱하게 쓰면 법적 처벌도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실제 시민단체가 아닌 일반 법인이 국고보조금을 잘못 처리하면 거짓으로 재무제표를 꾸미는 분식회계 혐의를 받아 법적으로 처벌받게 된다. 이어서 전 교수는 “비영리법인들이 외부감사를 투명성을 어필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해야 한다”며 “정부가 하나하나 감사를 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공익법인에 대한 외부감사가 더욱 중요해졌다”고 설명했다.
시민단체에 대한 국민적 감시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호영 연세대 경영대학 교수는 “작은 규모의 공익법인까지 외부감사를 요구하면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측면도 있다”며 “공익법인들의 공시에 대한 의식 개선도 중요하지만 기부자들이 객관적인 성과와 기부단체의 취지를 파악해 모금에 참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외부회계감사 비용이 비싼 만큼 시민이 기부를 할 때 해당 단체의 이력을 보다 면밀히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경운·김태영기자 cloud@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