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글로벌 산업지형을 뒤흔들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국가 안보뿐 아니라 미래 기술 패권의 핵심인 반도체 산업을 잡기 위해 전면전에 돌입했고 이는 중국 중심의 제조업 공급망을 재편하려는 움직임으로 구체화되는 상황이다. 한마디로 탈 세계화 속에 각자도생의 색채가 짙어지면서 글로벌 분업구조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무역 중심인 우리나라로서는 이런 흐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경우 제조강국의 위상이 순식간에 허물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높다. 각국 정부는 이미 코로나19 이후 산업지형을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최근 대만 파운드리 업체 TSMC의 미국 공장 건설 전격 발표, 화웨이에 대한 미국 정부의 반도체 칩 공급제한 규제, 일본 정부의 인텔 공장 유치전, 전자기업 샤프의 마스크 제조 등은 정부의 역할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런가 하면 인텔·애플·구글·엔비디아 등 정보기술(IT) 공룡들은 자율주행·인공지능(AI) 등의 분야에서 스타트업 인수를 통한 성장엔진 마련에 적극적이다. 코로나19에 따른 유망 벤처의 자금난이 미래 준비에 사활을 걸고 있는 기업에는 기술 수혈의 기회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부형 현대경제연구원 이사는 “비즈니스 모델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며 “모자란 부분을 M&A·제휴 등을 통해 내부자원화하는 역량이 강한 기업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글로벌 생산기지를 고려할 때도 인건비·환율 등 전통적 요소보다 그 국가가 보유한 혁신역량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한국 업체는 잠재력만 놓고 보면 세계 최고입니다. 메모리 반도체 ‘넘버 원’ 삼성전자, 글로벌 완성차 업체 현대차라는 대단한 기업을 갖고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막상 협력을 위해 한국 파트너를 찾으려고 하면 적임 업체를 찾기 너무 어려워요.”
최근 국내 자동차 업계의 한 전문가가 미국 자동차 업체 포드 임원으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다. 한마디로 삼성전자·현대차를 보유했음에도 왜 인공지능(AI)·자율주행 분야 등에서 최고의 부품 업체, 스타트업이 나오지 않는지 아이러니하다는 것이다. 포드 임원은 그러면서 “‘한국 업체들이 협업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포드 임원의 지적은 한국 산업의 현주소와 관련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7차 협력사까지 얽혀 있을 만큼 부품사가 난립해 있지만 이 가운데 해외 업체에 납품하는 업체 비중은 전체의 25%에 그친다. 대부분이 싫든 좋든 국내 대기업과의 전속거래에 안주하고 있다는 뜻이다. 질은 더 안 좋다. 오는 2030년이면 전기차(하이브리드 포함) 판매 비중이 30%(산업연구원 보고서)까지 치솟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지만 전장 업체는 부품사의 4%에 불과하다. 기계·전자부품 업체 간 전략적 협업은 기대조차 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기술기업에 대한 과감한 인수합병(M&A)이 활발한 것도 아니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박사는 “산업 시스템이 아직 전근대적인 생태계”라며 “국제 협력을 못하면 수출 다변화는 물론 미래 산업에 대한 국제표준도 선도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이부형 현대경제연구원 이사는 “이제 독불장군형 제조업은 다 망하는 시대”라며 “외부 리소스를 내부화시키는 데 적극적인 기업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완성차-IT 경쟁하는 시대…산업계 ‘게임의 룰’ 바뀌어
구글·엔비디아 등은 코로나에도 언택트 스타트업 인수
“韓기업 경영자원 조만간 소진…협업 통해 새도전 절실”
◇바뀐 ‘게임의 룰’…변신은 생존의 조건=글로벌 기업의 행보를 보면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이 떠오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공장과 물류가 멈추면서 글로벌 경제 곳곳이 마비증상을 보이고 있음에도 실리콘밸리의 최고 기업들은 미래 먹거리 마련에 혈안이다. 구글은 올 들어 앱시트(앱 프로그램)·루커(빅데이터 분석)를, 애플은 보이시스(음성 인식) 등 스타트업 3곳을 집어삼켰다. 최근 AI 기업 멜라녹스 인수를 마무리한 엔비디아는 데이터센터 네트워크 솔루션 기업인 큐물러스네트웍스를 사들이기로 결정했다. 일류 기업일수록 어수선한 코로나 정국에도 신기술 인수, 다른 기업과의 제휴 등에 거침이 없다. 인수 타깃 목록도 하나같이 AI, 빅데이터, 5세대(5G) 통신 등 고성장 산업이자 언택트(비접촉) 관련 기술 업체다. 현금성 자산만 100조원이 넘는 삼성전자 등은 상대적으로 더딘 의사결정에, 대부분의 기업은 유동성 확보에만 급급해 제자리걸음인 것과 대비된다. 김광석 한국경제산업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이제는 완성차 업체가 IT 기업과, 핀테크 기업이 금융사와, 유통 기업이 드론 업체와 같은 시장을 두고 경쟁하는 시대”라며 “이제는 껍데기가 아닌 내면의 DNA까지 바꾸는 근원적 변화를 추구해야 생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새 시도, 적과의 동침을 두려워해서는 안 돼=산업계에 위기의식이 커지면서 변화의 기운도 감지된다. 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 간 회동은 상징적인 사건으로 볼 수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두 기업 오너 간 회동은 급격한 산업 패러다임 변화에 맞춰 스스로 변신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메시지를 시장에 던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재계의 한 임원은 “이제는 현대차가 독일 인피니온의 차량용 시스템반도체만 고집할 게 아니라 삼성과 협력하는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며 “이는 전장 고객 확대를 위해 레퍼런스를 필요로 하는 삼성과 공급선 다변화가 가능한 현대차에 두루 득이 되고 전자와 기계부품 업체 간 기술 공유를 촉진하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벤처 및 자본 시장 활성화도 절실하다. 대기업의 신산업 접목 등 새 성장 엔진 마련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최근 여권이 대기업 지주회사에 벤처캐피털(VC) 설립 허용을 추진하는 것은 만시지탄이지만 다행스럽다는 목소리가 많다. 익명을 요구한 경제단체의 한 임원은 “대기업을 도울 ‘방향’을 찾는 게 아니라 지원을 해야 한다”며 “기존 사고방식을 벗지 못하면 먹거리를 만들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 이사는 “기존 산업이 변곡점에 서 있고 코로나19 사태로 로컬라이제이션(localization)까지 겹쳐 현재 확보한 경영 자원은 머지않아 소진된다”며 “기업들은 스타트업 등 신흥 강자, 경쟁 업체,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진 업체 등과 손잡고 새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정부는 이를 위해 규제를 풀어주는 식의 협업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