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4년 5월21일 흑해 서부의 산악마을 크바데. 러시아군이 승전 퍼레이드를 펼쳤다. 1763년부터 시작돼 100년 넘게 이어진 체르케스 전쟁의 종결에 러시아군은 들떴다. 오랫동안 진행된 전쟁으로 증오도 깊었다. 러시아군 총지휘관인 미하일 로마노프 대공작(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형)은 전 주민에게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체르케스 모든 마을의 주민들은 황급히 짐을 꾸려 무작정 떠나야만 했다. 육로 이동이 허용되지 않아 대부분 흑해 부근에 도착해 하염없이 배를 기다렸다. 이동 도중 기아와 전염병으로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승리한 러시아는 주요 지명의 이름을 바꿨다. 크바데의 새 이름은 ‘크라스나야 폴랴나’.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에서 스키 경기가 열린 바로 그 도시다. 소치 또한 마지막까지 항거했다는 역사의 아픔이 서려 있다. 체르케스인들은 왜 쫓겨나고 소치올림픽이 열릴 때 눈물을 흘려야 했는가. 러시아 제국주의 탓이다. 18세기 초반 유럽화·근대화 이후 러시아는 바깥으로 눈을 돌렸다. 시베리아는 물론 중앙아시아에도 세력을 펼치고 오스만튀르크의 흑해 제해권도 넘봤다. 러시아의 공세가 본격화한 시기는 크림전쟁(1853~1856년) 이후부터.
오스만튀르크를 도운 영국과 프랑스에 막힌 크림전쟁 패배 이후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와 흑해의 중요성에 눈에 떴다. 영국이 인도에서 북상하는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 코카서스 지역을 확보하려는 러시아에 원주민들은 완강하게 맞섰다. 특히 체르케스 무슬림 산악부족의 저항이 드셌다. 체르케스인들은 1861년 거주권과 생활방식을 보장하면 차르의 통치권을 수용하겠다는 뜻을 거듭 밝혔으나 러시아는 귀에 담지 않았다. 추방만이 해결책이라는 결론을 이미 내린 러시아는 소치에서의 마지막 저항을 짓밟자마자 추방령을 내렸다.
체르케스인들의 95%가 고향에서 쫓겨나 터키와 요르단 등으로 흩어졌다. 전 세계에 500만~700만명으로 추정되는 이들 중 70만명만 러시아에 남았다. 어디서 살든 체르케스인들은 조상들이 빠져 죽은 흑해산 생선은 먹지 않는다. 러시아 학계는 학살은 없었다는 입장을 강조하지만 추방령은 결과적으로 인종청소와 같은 효과를 냈다. 국적과 인종에 대한 차별은 ‘소치의 눈물’뿐만이 아니다. 체르케스인을 받아들인 터키는 아르메니아인 강제이주와 학살을 저질렀다. 국제사회가 아르메니아 사태를 외면하는 현실을 지켜본 히틀러는 유대인 학살을 머릿속에 그렸다. 추방과 학살은 인류에 대한 죄악이다. 학살범은 공소시효를 넘어 처벌해야 마땅하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