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세계 무역질서를 뒤흔들고 있다. 각국의 봉쇄 조치와 자국 우선주의에 따른 글로벌 공급망(supply chain) 재편이 기존 산업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미국은 중국을 빼고 산업 공급망을 다시 짜자는 ‘경제번영네트워크(EPN)’를 앞세워 한국의 참여를 압박하고 있다. 우리 기업들로서는 진퇴양난에 빠진 셈이다.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인 허대식 한국생산관리학회장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아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가속화할 것”이라면서 “지역별 블록화에 대비해 권역별 거점을 세우고 혁신 플랫폼을 구축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허 학회장은 또 “획기적 유인책으로 국내외 기업들을 한국으로 적극 유치해야 한다”면서 “민간에 권한과 자율권을 과감히 부여해 시장 역동성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문했다.
-코로나19로 글로벌 공급망 변화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기업의 공급망은 원재료 공급업체로부터 시작해 최종소비자에 이르는 과정에서 제품·정보·자금의 흐름에 참여하는 모든 기업을 총괄적으로 일컫는 개념이다. 그간 미국을 중심으로 공급망 재편 움직임이 있었지만 코로나19로 그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폭과 깊이도 넓어지고 있다. 코로나19는 수요와 공급의 양 측면에서 기존 공급망에 충격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기업에 상당한 타격을 안겨주고 있다. 우리 기업들도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세계 시장 환경 및 경제지형의 변화에 대응해 기존의 글로벌 공급망을 재검토하고 시장 경쟁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바꿔야 할 때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까지 겹쳐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으로서는 충격이 클 수밖에 없는데.
△우리 기업들로서는 굉장히 난감한 상황이다. 미중 갈등이 벌어지고 있지만 두 나라 중 어느 한 곳도 포기하기 어렵다. 머지않아 양자택일의 벼랑 끝으로 몰릴 수 있으므로 만반의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 대만의 TSMC는 미국 시장 매출이 전체의 60%를 넘다 보니 미국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국내 기업들은 중국을 단순한 가공 기지가 아니라 거대한 소비 시장으로 보고 있어 어려움이 크다. 무엇보다 중국 이외의 생산거점을 만들어 단계적으로 중국 비중을 낮추는 전략이 필요하다. 중국이라는 거점을 유지하면서 대체생산 거점을 다른 나라에 구축하는 ‘차이나+1 전략’이 바람직하다.
-앞으로 지역 블록 중심으로 세계 경제의 판도가 바뀐다는 관측도 나온다.
△자국 중심의 공급망을 구축하도록 압력이 가해지면서 주요 경제 권역별 지역주의가 대두될 것이다. 지역별 블록 현상이 가속화한다는 얘기다. 미국이나 유럽도 그렇거니와 중국은 ‘일대일로’ 정책을 내세워 중화권 중심으로 나아갈 것이다. 일본의 경우 일찍이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투자에 주력해왔다. 아세안에서 미래를 개척하겠다며 교육·문화까지 동반 진출하는 식으로 공급망을 구축해왔다. 우리도 이에 맞서 동유럽이나 멕시코·아세안 등으로 지역거점을 세울 수밖에 없어 제조업 공동화 우려가 높아질 것이다.
-권역별 공급망 위주로 굴러간다면 우리가 불리한 것 아닌가.
△다른 경쟁국들은 자신의 권역을 발판으로 삼아 다른 권역으로 진출한다. 안정적인 수익을 확보할 수 있는 자기 권역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권역이 없다. 기업들은 아마 상당히 힘들어질 것이다. 여러 지역에 거점을 마련하다 보면 비용 부담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공급망을 분산하는 과정에서 복원성(resilience)과 유연성(flexibility)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지역 현지화를 통한 공급망 시장 대응성을 높이고 국내 제조 역량 강화를 통한 혁신 플랫폼 구축도 필요하다. 결국 중국 시장 의존도를 단계적으로 낮추고 아세안을 기본 공급망으로 설정하는 방향이 바람직할 것이다.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무엇이 중요한가.
△일단 미국처럼 후방형 거점을 제대로 확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협력업체의 복원력을 키우고 유연성을 갖추도록 위험을 분산시켜야 한다. 아울러 우리의 경우 수출 시장도 다변화해야 한다. 지나치게 중국에 올인하면 향후 무역 갈등을 고려할 때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앞으로 경기 침체가 길어진다면 결국 원가 싸움이다. 향후 2∼3년간 가격 경쟁이 극심해질 것이다. 기업들의 최대 난제는 공급망을 재편하면서 원가를 통제하는 것이다. 누가 원가 문제를 잘 해결하느냐에 코로나19 이후의 승부가 걸려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핵심 경쟁력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공급망의 복원력과 유연성이다. 구체적으로 부품 표준화 및 공용화를 통해 유사시 부품 간 대체 가능성을 확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 핵심 부품에 대해 복수 업체를 선정하고 이들 업체를 지역적으로 분산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단일 업체만 존재하는 경우 대체품을 개발하거나 대체 생산 거점을 확보해야 한다.
-코로나19 사태로 각국마다 치열한 기업 유치전을 벌이고 있다.
△미국은 일찍이 리쇼어링을 위해 파격적인 법인세 인하 정책을 펼치며 기업을 유인하고 있다. 중국은 ‘제조2025’를 통해 자기 완결성을 구축하는 홍색공급망 전략을 추진해왔고 일본도 올해 초 포스트 코로나 정책을 내놓았다. 자국을 중심에 놓고 고부가가치 제품을 생산하면서 유리한 방향의 공급망을 만들겠다는 전략이다. 코로나19로 지역 간 갈등이 심화하면서 자국으로의 제조업 회귀를 촉진하는 리쇼어링 정책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은 일찍이 리쇼어링 정책에 적극 나섰는데.
△미국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시절부터 ‘리쇼어링 이니셔티브’를 도입해 결실을 맺었다. 해마다 500개씩 기업이 돌아오면서 만들어진 일자리만 80만개에 달하고 있다. 생산관리나 공급망에서 바람직한 산업을 둘러싼 논의도 활발하게 이뤄졌다. 디지털 시대를 맞아 중국이나 인도에 머무르기보다 실리콘밸리와 협업관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다. 나이키가 멕시코에 공장을 짓듯이 ‘니어쇼어링(near-shoring)’도 한 방안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반도체를 자급자족하겠다는 것도 결국 외국 기업을 미국으로 들어오도록 만들겠다는 것이다. 삼성의 경우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을 유지하려면 미국으로 들어오라는 압박이 있을 것이다. 삼성과 LG가 트럼프 정부의 수입제한조치(세이프가드)로 어쩔 수 없이 미국에 들어가지 않았나.
-우리는 리쇼어링 유인책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진짜 혁신적인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 여러 제한 조건이 따라붙는 기존의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일본만 해도 중국에서 아세안으로 옮겨가는 기업들의 이전자금까지 지원할 정도다. 미국은 법인세를 대폭 낮춰주고 컨설팅 조직을 따로 운영하고 있다. 우리도 미국의 ‘리쇼어링 센터’처럼 별도의 조직을 만들어 회귀하려는 업체를 도와주는 노력을 해야 한다. 정부가 직접 현장 의견을 수렴해 정책을 내놓는 창구를 만드는 등 혁신적 방안이 절실하다.
-기업을 다시 끌어들일 수 있는 인센티브가 있다면.
△기업들은 공장 입지 문제를 가장 많이 얘기한다. 유능한 인재를 유치하려면 교육이나 생활 여건에서 충분한 유인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수도권 규제 문제도 전향적으로 검토할 때가 됐다. 네이버 데이터센터 유치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환경 이슈나 지역 민원 해결에 지방자치단체들이 적극 나서야 한다. 대규모 공장을 지을 때 더 이상 전력 같은 인프라 구축 과정에서 애로를 겪지 않아야 한다. 중소기업의 경우 기술 노하우나 경영 기법을 전수해주고 자금 지원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산업 정책이 현장과 괴리돼 겉돈다는 지적도 많다.
△정책당국이 부처 간의 장벽을 과감히 없애고 고객인 기업 중심으로 조직을 운영해야 한다. 현재 스마트공장이나 소재부품 산업 육성, 제조업 르네상스 등 정책마다 담당 부처가 따로 있어 혼란스러울 정도다. 잘되는 기업은 고객을 중심에 놓고 회사 자원을 동원해 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든다.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해결책을 만들자면 여러 부서 간의 조정이 필요하므로 통합기구를 만들 필요가 있다.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정부가 할 일은 뭔가.
△코로나 위기를 헤쳐가는 데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특히 방역 과정에서 탄생한 진단키트와 드라이브스루는 민관이 협력해 결실을 맺은 성공 사례로 볼 수 있다. 정부와 민간의 역할이 초반에 잘 정리됐고 민간에 많은 권한과 자율권을 부여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처음에 긴급사용승인을 받은 회사 중에는 중소기업도 있었는데 이들의 능력을 믿고 활약할 수 있도록 정부가 북돋운 덕택이 컸다. 민간 기업들이 마음껏 뛸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준 것은 비단 방역뿐 아니라 모든 정책에서 유용한 카드로 쓰일 수 있다. 과감히 규제를 혁파하고 기업 활동을 지원해야 할 때다. K방역으로 국가 브랜드가 높아진 지금이야말로 한국 경제를 한 단계 도약시킬 절호의 기회다.
/정상범 논설위원 ssang@sedaily.com
He is…1966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고와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볼링그린주립대에서 경영학 석사학위, 인디애나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볼링그린주립대 조교수, 연세대 상남경영원 부원장, 아시아태평양의사결정학회 회장 등을 지냈다. 현재 연세대 경영대학 교수를 맡고 있으며 한국구매조달학회 부회장, 한국로지스틱스학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