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익산시는 유독 종교시설이 많은 곳이다. 인구 28만명 남짓한 곳에 100개가 넘는 개신교회와 천주교 성지 및 성당, 원불교 성지와 본당, 전통 불교사찰까지 여러 종교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금강과 인접한 지리적인 특성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이 가장 설득력 있다. 서해와 연결된 물길을 통해 다양한 문물이 오가면서 여러 종교가 거부감 없이 뿌리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천주교 대표 성지인 나바위성당(국가지정문화재 사적 318호)도 그중 하나다.
전북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는 금강을 경계로 건너편은 충남 부여, 오른쪽은 충남 논산으로 나뉘는 도시의 경계지점이다. 이곳에는 화산(華山)이라는 작은 산이 있다. 산이 너무 아름다워 우암(尤菴) 송시열 선생이 화산이라 이름 붙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그 화산의 정점에 한국 천주교 나바위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가 지난 1845년 중국에서 사제품을 받고 고국으로 돌아와 첫발을 내디딘 곳이다. 그만큼 한국 천주교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곳은 천주교인들에게는 축복의 땅으로 여겨진다.
익산역에서 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나바위성당은 한적한 시골마을 제일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23번 국도를 타고 가다 동네 길로 들어서면 입구부터 성당을 알리는 큼직한 표지판이 나온다. 마을의 중심이 바로 나바위성당임을 알 수 있다. 성당은 화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어 가까이 가지 않고는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성모 마리아상을 지나 오르막을 올라가면 언덕 위에 파란 하늘과 맞닿아 있는 붉은색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성당은 주변 소나무와 어우러져 멋스러운 풍경을 연출한다. 국내 유일의 한옥과 고딕 양식이 조화를 이룬 독특한 건축양식 때문일 것이다.
초기의 나바위성당은 작은 초가집이었다. 초대 주임 베르모렐 신부를 중심으로 1906년 제대로 된 성당의 모습을 갖췄고 이후 1917년 증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 한국 전통양식과 서양양식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성당의 설계는 명동성당 등을 설계한 푸아넬 신부가 맡았고 공사는 중국인들이 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건물 상단의 팔각창 등 당시 중국식 건축물에서 흔히 보이는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초기 지붕에 기와를 얹은 목조건물로 세워진 성당은 증축과정에서 외벽을 벽돌로 바꾸고 지붕 위에 있던 종탑을 분리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이때 처마 아래 있던 나무마루를 걷어내면서 전통사찰의 회랑 같은 공간이 마련되기도 했다.
성당 내부는 또 다른 모습이다. 가장 큰 특징은 성당 내부를 좌우로 가르는 나무기둥이다. 남녀 신자들의 좌석을 구분하기 위한 칸막이 역할을 했다고 한다. 특히 창문에는 일반 성당에서 흔히 보던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닌 한지가 붙어 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 신자들이 직접 한지에 그림을 그려 붙이던 전통이 100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다. 성당은 현재 역사관으로 사용 중인 사제관과 함께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318호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성당 뒤편으로 난 산책로를 따라 화산으로 오르면 김대건 신부의 성상이 있다. 그 옆으로는 성모 마리아상을 중심으로 넓은 잔디밭이 깔려 있는데 1,200명이 한꺼번에 미사를 볼 수 있는 야외공간인 성모동산이다. 소나무 오솔길을 따라 산 정상으로 올라가면 1955년 김대건 신부 시복 30주년을 기념한 김대건 신부 순교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들어올 때 타고 온 선박 라파엘호의 크기에 맞춰 제작됐는데 신자들이 인근에서 직접 돌을 깎은 뒤 이곳까지 옮겨와 한 단 한 단 쌓았다고 한다. 그 바로 옆은 망금정(望錦亭)이다. 정자 위로 올라서면 김대건 신부가 라파엘호를 타고 들어온 금강 줄기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천주교인이 아니더라도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들러보길 권한다. /글·사진(익산)=최성욱기자 secret@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