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정책·제도

서울 아파트 조상님 '시민·시범 아파트' [박윤선의 부동산 TMI]

/일러스트=진동영기자/일러스트=진동영기자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아파트는 어디일까요. 바로 서울시 서대문구 충정로에 위치한 ‘충정아파트’입니다. 초록색 외관이 눈길을 끄는 이 아파트는 1932년 일제에 의해 지어져 올해로 무려 88세에 달합니다. 하지만 충정아파트가 지어진 후로 수 십 년간 아파트는 우리나라에 뿌리내리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대중적인 주거양식이라기보다는 소수의 전유물에 불과했죠. 실제로 충정아파트가 훗날 주택이 아닌 관광호텔로 사용됐을 정도니까요. 이렇듯 외래문물이었던 아파트가 대중화된 계기가 있습니다. 바로 1970년대 ‘시민아파트’와 ‘시범아파트’가 들어서면서부터 입니다. 시민아파트와 시범아파트는 어떻게 세상에 등장하게 됐을까요? 한 글자 빼고 다 똑같은 두 아파트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 ‘불도저’ 김현옥 서울시장의 흥망성쇠가 담긴 ‘시민 아파트’

= ‘불도저’ ‘돌격시장’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김현옥 전 서울시장을 아십니까? 1966년 서울시장에 임명된 김현옥 시장은 별명에 걸맞은 파격적이고 대대적인 도시 개발로 유명했습니다. 명동 지하도와 세운상가, 강변북로, 여의도 개발 그리고 오늘 이야기할 시민 아파트가 모두 그의 손에서 시작된 사업들입니다.


시민아파트는 서울의 판자촌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탄생했습니다. 6.25 전쟁이 끝나고 지방민들이 서울에 몰려오면서 서울 시내 곳곳에는 무허가 판자촌이 급증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김현옥 시장에게 무허가 건물 정리를 지시했고 김 시장은 판자촌을 허물고 시민아파트를 지어 서민들을 입주시키겠다는 구상을 내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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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계획규모는 1969년부터 1971년까지 2,000동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2,000가구가 아니라 2,000동이라니. 불도저라는 이름이 정말 딱 어울리죠? 서울의 1호 시민아파트는 1969년 서대문구 천연동에 19동 규모로 지어진 금화시민아파트였습니다. 이곳을 시작으로 이 해에만 400여 동의 시민 아파트가 지어졌습니다. 하지만 2,000동을 짓겠다는 야심찬 계획은 결국 완성되지 못합니다. 1970년 마포구 창천동에 위치한 와우 시민아파트가 붕괴하는 사고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입주 4개월 만에 일어난 참사였습니다. 김현옥 시장은 결국 이 일을 계기로 시장직에서 물러납니다.

◇회현 제2시민아파트? 회현 제2시범아파트?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로 시민아파트가 부실·날림 공사로 지어졌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나지만 이미 삽을 뜬 단지들은 공사를 이어갔습니다. 그렇게 완공된 곳이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마지막 시민아파트인 ‘회현 제2시민아파트’입니다. 1970년 서울시 중구 회현동 남산자락에 지어진 이 아파트를 김현옥 시장은 ‘시범아파트’라고 명명했습니다. 와우 시민아파트는 실패했지만, 회현 시민아파트는 무너지지 않는 시범적인 아파트가 돼야 한다는 의미에서였습니다. 김 시장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 단지의 이름은 회현 제2시민아파트로 남았습니다.

그렇다면 시범아파트는 어떻게 시작됐을까요?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 사고 이후 새롭게 공급된 시민아파트는 시범아파트라는 이름으로 지어졌습니다. 말하자면 시민아파트의 업그레이드 버전이었죠. 그런데 1971년, 이러한 개량형 시민아파트와는 전혀 다른 콘셉트의 시범아파트가 등장합니다. 바로 여의도 시범아파트입니다. 중산층을 겨냥해 단지형, 고층, 중대형 평형으로 지어진 것이 특징입니다. 서울시가 하필 여의도에 이러한 시범 아파트를 선보인 이유는 여의도 땅을 팔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여의도를 조성하고 민간에 땅 분양을 시작했지만 여의도에 선뜻 건물을 짓겠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서울시가 시범적으로 여의도에 고층 아파트 단지를 보급했고 이후 민간의 여의도 투자도 이내 늘어나게 됐습니다. 이렇듯 현대 서울의 굴곡을 담고 있는 시민아파트와 시범아파트를 계기로 우리나라의 대표 주거 양식은 아파트로 변모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시민아파트와 시범아파트는 오늘날 아파트 공화국의 시조인 셈입니다.

박윤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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