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 사건으로 촉발된 미국의 유혈 시위 사태는 미국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양극화와 소득불균형 등 구조적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악화된 경제상황과 맞물려 증폭된 결과라는 분석이 잇따르고 있다.
이번 시위 사태는 지난 5월25일(현지시간) 미니애폴리스에서 백인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흑인 남성이 사망한 것이 직접적 계기지만, 오랫동안 이어져온 흑인차별과 백인우월주의 문화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이 누적돼온 결과라는 것이다. 여기에 실업률 급증 등 코로나19 경제 피해가 집중된 히스패닉 커뮤니티 등의 분노도 시위를 고조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5월31일 워싱턴포스트(WP) 등에 따르면 미국 경찰은 지난 주말 동안 24개 도시에서 과격시위 가담자 2,500명 이상을 체포했다. 시위가 폭력적으로 변하면서 지금까지 최소 5명 이상이 총격으로 숨졌다. 5월30일 뉴욕에서만 시위로 경찰차 47대가 파손됐고 경찰관 33명이 부상했다.
수도인 워싱턴DC뿐 아니라 미니애폴리스와 로스앤젤레스·샌프란시스코·시애틀·댈러스·애틀랜타·마이애미·시카고·필라델피아 등 서부에서 동부에 이르는 주요 도시가 이날 통행금지 명령을 내렸다. 전시를 방불케 하는 무법 상황에 1968년 마틴 루서 킹 목사 암살 이후 처음으로 40여개 시에서 동시다발적인 통금이 시행된 것이다. 애리조나는 주 전체에 이를 적용했다. 전체의 절반이 넘는 26개 주와 워싱턴DC에 최소 5,000명의 주 방위군이 배치됐다.
엿새째 이어진 시위가 미국의 140개 도시로 번지면서 미 전역은 초긴장 상황이다. 심지어 백악관 인근 라파예트 공원과 세인트 존 교회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시위대 해산을 시도했다. CNN에 따르면 백악관은 직원들에게 출입증을 숨기고 출퇴근하라고 했고 5월29일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시위대가 몰려들자 백악관 지하벙커로 피신한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억눌린 구조적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누적된 시민들은 소수인종이 목소리를 내는 길은 시위밖에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페어팩스 지역의 시위에 참가한 여성은 ABC에 “우리는 쓰레기 취급을 받고 있다. 평소 이곳에 오지 못하고 어울릴 수 없다”며 “이게 아니면 우리의 목소리를 낼 수 없다”고 밝혔다.
실제 2016년 10월 말부터 올해 5월27일까지 미니애폴리스 길거리와 도로에서 경찰에 단속된 흑인은 4만9,733명으로 백인(3만4,583명)보다 약 43.8% 많다. 반면 이 지역의 백인 인구 비중은 59.8%로 흑인(19.05%)의 3배가 넘는다. 완전고용 상태였던 올 2월의 미 전국 실업률은 아시안이 2.5%로 가장 낮고 백인(3.1%), 히스패닉(4.4%) 순이었다. 흑인과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무려 5.8%였다.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19 충격이 더해졌다. 오는 5일 나올 5월 실업률은 셧다운(폐쇄) 여파에 대공황 때 수준인 20% 안팎으로 치솟을 것으로 전망된다.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미국에는 화가 난 4,000만명의 실업자가 있다”며 “한 달 전에 전망했듯 코로나19 위기는 소요와 파괴를 불러올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미국인들은 흑인들의 심정을 공감하면서도 폭력 사태와 약탈은 안 된다고 보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분노는 옳지만 소요는 잘못됐다”고 비판했다.
과격시위가 미국 사회를 더 갈라놓고 이제 문을 다시 열기 시작한 경제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시위 기간에 약 12곳이 피해를 입은 월마트는 미 전역에서 수백개의 매장을 폐쇄하기로 했다. 대형마트 타깃은 200개 점포의 문을 닫기로 했고 스타벅스와 맥도날드도 일부 매장의 영업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아마존은 시카고와 로스앤젤레스 등 일부 도시의 물류창고 운영을 중단했다. 워싱턴DC의 샌드위치 매장을 약탈당한 밥 그루얼은 “우리 같은 업주들은 이번 일과 무관하다”고 호소했다. 미니애폴리스에서는 유조차 트럭기사가 I-35 고속도로를 메운 수천명의 시위대를 향해 의도적으로 돌진한 일도 벌어졌다.
흑인들의 터져 나온 불만은 11월 대선에도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다. 현재 흑인 러닝메이트 지명 압력을 받고 있는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은 이날 델라웨어주의 시위현장을 직접 찾은 뒤 “(흑인들과의) 대화를 이끌 것”이라고 달랬다. 뉴욕타임스(NYT)는 “흑인들은 ‘트럼프만 아니면 된다’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민주당에 보냈다”고 해석했다. 미 경제방송 CNBC는 “코로나19 대유행과 기록적인 실업률 속에서 시위가 격화하면서 미국의 위기가 더 깊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일로 트럼프 대통령이 당분간 중국과의 갈등보다 사태 수습에 주력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내놓는다. /뉴욕=김영필특파원 susopa@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