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법 전면개정안이 20대 국회에서 상임위원회 소위조차 한 번 열지 못할 정도로 지지부진한 논의 끝에 자동 폐기된 것은 기업의 경영활동 위축에 대한 재계와 야당의 우려가 워낙 강했던 탓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라는 돌발변수로 경제위기가 심화하고 있음에도 정부가 법 개정을 다시 추진하고 나선 배경에는 지난 총선을 통해 거대의석을 확보한 정치지형에 대한 자신감이 깔려 있다. 김재신 공정거래위원회 사무처장은 10일 관련 브리핑에서 “경제상황이 어려워지기는 했으나 공정한 시장경제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다.
정부의 이런 설명에도 불구하고 산업계가 우려를 거두지 못하는 것은 기업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조항들이 사실상 그대로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우선 개정안은 공정위만 검찰에 고발할 수 있는 권리인 ‘전속고발권’을 가격과 입찰 등 중대한 담합(경성 담합) 분야에서는 폐지했다. 공정위는 “검찰과 경쟁당국이 정보 공유를 통해 ‘우선 조사’ 등에 대한 기준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재계에서는 여전히 중복수사에 대한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유정주 전국경제인연합회 기업제도팀장은 “정보 취합이나 내사 단계에서는 완벽한 공유가 힘들고 경우에 따라서는 기관 간 실적경쟁이나 힘겨루기가 펼쳐질 수밖에 없다”며 “전속고발권이 사라지면 기업들은 고발 남용에 따라 ‘사법 리스크’가 한층 높아지게 되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공정거래법을 위반한 사업자에게 부과하는 과징금의 상한은 두 배로 높아진다. 관련 매출액의 일정 비율로 정한 과징금 상한은 담합이 10%에서 20%로, 시장지배력 남용은 3%에서 6%로, 불공정거래행위는 2%에서 4%로 각각 올렸다. 일감 몰아주기 감시 대상도 대폭 확대된다. 현재는 총수 일가 지분이 30%(비상장사는 20%) 이상인 회사가 감시 대상이지만 이 기준을 상장사·비상장사 구분 없이 20%로 일원화한다. 전경련은 상장사 기준으로 총수 일가 지분이 20~30%인 기업들이 법 개정에 따라 규제를 피하기 위해 20%를 초과하는 지분을 매각할 경우 4조1,000억원 이상이 필요할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개정안은 계열사가 50% 넘게 지분을 보유한 자회사도 일감 몰아주기 감시 대상에 추가했다. 이 조항들이 모두 통과되면 현재 지분 기준으로 규제 대상 기업은 210개에서 591개로 늘어난다. 현대글로비스·삼성생명·SK를 비롯해 삼성물산의 자회사인 삼성웰스토리 등이 줄줄이 공정위의 레이더망에 걸려들게 된다. 김현수 대한상공회의소 기업정책팀장은 “지주회사는 본질적으로 다른 회사 지배를 주된 사업으로 하는 회사이기 때문에 자회사 보유지분이 높을 수밖에 없다”며 “정부가 경영 투명성을 높이는 차원에서 지주회사 전환을 정책적으로 유도해놓고 관련 규제를 강화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처사”라고 비판했다.
지주회사의 자회사·손자회사 지분율 요건도 강화된다. 현재 상장사 20%, 비상장사 40%인 기준이 각각 30%, 50%로 높아진다. 다만 그동안 정부가 대기업의 지주회사 전환을 유도해온 측면을 고려해 새로 만들어지는 지주회사에만 적용하기로 했다. 기업 입장에서는 보유지분 기준 상향으로 더 많은 돈이 필요해지기 때문에 자회사·손자회사를 늘리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기 힘들어진다.
개정안에는 벤처지주회사 설립요건을 완화하는 내용도 담겼으나 대기업의 기업형 벤처캐피털(CVC) 제한적 보유 허용과 관련한 방안은 포함되지 않았다. 앞서 정부는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을 통해 CVC의 제한적 허용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으나 공정위는 금산분리 원칙 훼손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법 개정이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세종=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