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6월 11일 미국 수도 워싱턴 D.C. 미국과 소련이 무기 대여에 대한 최종 협정을 맺었다. 골자는 무기대여법(Lend-Lease Act) 대상에 소련을 포함하는 것. 미국은 소련에 무기를 공급하기 위해 법까지 바꾸는 성의를 보였다. 당초 지원 대상을 ‘민주주의 국가’로 한정했으나 ‘자유를 위해 싸우는 나라’로 확대한 이유가 바로 소련 때문이다. 미국은 소련이 요구하는 만큼 무기를 보내려 애썼다. 미국의 지원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각종 항공기 1만 4,795대, 전차 7,056량, 지프 5만 1,503대, 트럭 37만 5,883대, 오토바이 3만 5,170대, 화차 11,155량, 기관차 1,981량을 보냈다.
무기뿐 아니다. 식량 448만톤, 비철금속 80만톤, 석유제품 267만톤, 화학제품 84만톤, 면화 1억 689만톤, 가죽 4만 9,860톤, 타이어 379만개, 군화 1,542만 족이 미국 배에 실려 소련 땅에 들어갔다. 소련은 훗날 미국에서 받은 전쟁물자의 비중은 4%에 불과했다며 무기대여법의 기여를 깎아 내렸지만 과연 그럴까. 미국제 무기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조차 성과를 거뒀다. 소련 탱크부대는 미국제 통신장비 덕분에 독일군과의 격차를 줄였다. 더 큰 공헌은 병참. 독일군 선봉은 기계화부대였으나 일반 사단은 말 5,000마리의 수송력에 의존하는 구식군대였다.
나폴레옹 군대의 진군 속도보다 느렸던 독일군에 비해 소련군은 미국제 지프와 트럭을 타고 빠르게 움직였다. 미국제 기관차는 러시아의 드넓은 국토를 가로지르며 물자를 날랐다. 소련은 자국산 전투기의 비중이 압도적(85%)이었다고 강조하지만 내용 면에서도 미국과 영국에 큰 도움을 받았다. 기술 수준이 낮아 전투기 날개마저 방부 처리도 안된 나무로 제작하던 소련은 미국제 합금으로 제작한 동체에 미국제 엔진을 끼우고 미국제 무전기로 통신하며 미국이 보낸 항공유를 썼다.
막대한 물량을 지원받으면서도 스탈린은 뻔뻔하게 ‘더 많이’를 외쳤다. 미국은 전략폭격기 등을 제외하고는 소련의 요구를 대부분 들어줬다. 오모 바르토프 브라운대 교수에 따르면 ‘스탈린 체제가 끔찍한 범죄국가였더라도 붉은 군대의 엄청난 희생이 없었으면 독일군은 쉽게 패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소련과 싸우지 않아 전투력이 온전한 독일군과 미군이 직접 맞붙는 경우를 피하기 위한 차선책이 대소 무기지원이었다는 것이다. 2차대전에서 미군과 소련군 전사자 비율은 1대 60이라는 격차를 보였다. 미·소 동맹의 계산식은 피와 물자의 교환이었던 셈이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