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구는 작지만 연기 내공이 단단한 배우 이주영은 20대 초반부터 지금껏 연기 하나만 바라보고 쉼 없이 달려왔다. 하나의 작품을 통해 대중에게 ‘배우 이주영’의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단편 영화든 저예산 독립영화든 장르는 중요하지 않았다. 배우로서 그의 삶은 자신의 꿈을 꿋꿋이 밀고 나가는 ‘야구소녀’속 ‘주수인’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지난 10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주영은 영화 개봉을 앞두고 “영화계가 좋지 않은 상황이지만 극장가가 6~7월에는 조금 활발해질 것 같다. ‘야구소녀’가 초반주자로 탄력을 주면 좋지 않을까 생각 한다”며 기대에 부푼 모습이었다. ‘야구소녀’는 고교 야구팀의 유일한 여자로, 프로 선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주수인(이주영)이 졸업을 앞두고 프로를 향한 도전과 현실의 벽을 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최근 종영한 JTBC ‘이태원 클라쓰’에서 ‘마현이’로 인기를 얻은 이주영은 이번 영화에서 끈기와 뚝심을 지닌 ‘주수인’으로 열연을 펼친다.
“첫 드라마는 아니었지만 ‘이태원 클라쓰’로 처음 폭발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았어요. 부담스럽다기보다 마냥 좋았던 것 같아요. 애정으로 작업했던 작품이 사랑받는다는 건 배우에게 좋은 일이고, 다음 기회의 장이 넓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죠. 배우로서 ‘예전에는 못했었던 걸 시도해볼 수 있겠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났다’는 느낌을 받아서 좋았어요.”
드라마를 통해 배우 인지도가 상승한 후로도 그는 늘 다음 작품에 목말라 있었다. ‘야구소녀’는 이주영이 가진 갈증을 해소해 준 작품이었다. 배우의 길로 나아가는데 있어 전작과는 다른 결을 지닌 영화였다. 특히 이주영은 영화 속 ‘주수인’이란 캐릭터에 강하게 이끌렸다.
“저를 비롯해 현 시대 사람들이 잊고 있는 마음들을 복기시켜줄 수 있는 작품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20대 초반부터 쉬지 않고 달려오면서 결과적으로 제가 가진 목표나 꿈보다 그냥 앞만 보고 그렇게 왔던 것 같아요. 주수인은 자신만이 가진 의지와 뚝심으로 주변까지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갖게 하는 인물인데, 나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응원하고 변화시키게 만드는 인물이라서 매력을 느꼈어요.”
이주영은 ‘주수인’을 연기하면서 자칫 민폐 캐릭터로 보이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이 계속 만류하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걱정하는데도 주수인은 그런 우려들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하무인으로 보일 수 있는 지점이 없지 않지만 이주영은 의지와 노력을 바탕으로 꿈을 향해 고군분투하는 주수인을 응원하고 싶은 캐릭터로 만들었다.
“주수인은 충분히 프로가 될 수 있는 실력을 지니고 있지만 ‘지금 너와 같은 길을 가는 여자선수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벽에 가로막히고, 많은 사람들이 만류해요. 끈기 있게 자기 길을 가는 과정에서 미움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안하무인으로 자기 것만 밀고 가거나 고집 부리는 것이 아니라 ‘꿈을 이루고자 할 뿐인데, 야구가 하고 싶을 뿐인데…’라는 생각이 드니까 안쓰러웠어요. 저라도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많이 들었어요.”
야구선수 주수인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내기 위해, 이주영은 프로를 꿈꾸는 고교 선수들과 한 달 정도 함께 훈련을 받았다. 체대 출신인 그는 운동 분야에 특화된 편이기도 했으나 그에게도 야구는 정말 어려운 스포츠였다. 대신 야구를 직접 배우면서 또 선수들 옆에서 지켜보면서 주수인이 느꼈을 감정을 오롯이 체감할 수 있었기에 이 훈련은 큰 도움이 됐다.
“그들이 가진 능력치와 내 능력치가 다른 만큼 ‘난 정말 안되겠다’거나 ‘몇 번이고 쓰러질 것 같은 순간들이 많았겠다’고 느꼈어요. 극 중 주수인이 남학생들과 달리 화장실 한 칸을 라커룸으로 쓰고 있는 부분에서부터 ‘수인이는 출발점이 다르고, 이들은 겪지 않아도 될 감정들을 겪고 있겠구나’ 작게는 소외감일 수 있지만 크게 보면 ‘정말 꿈을 포기해야 되나’까지 나아갈 것 같았죠. 그런 부분들을 그 무리 안에 속해있으면서 저도 조금이나마 이해했었던 것 같아요”
그는 야구 훈련까지 받으며 주수인에 완전히 몰입돼 연기했으나 한계에 부딪히는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구속 134㎞를 던지는 투수역할을 해내야 하는데 훈련을 받고, 아무리 공을 던져 봐도 실제 구속이 50~60㎞를 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주영은 크게 낙담했다.
“잘하고 싶은데 체력과 실력이 어느정도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아 슬럼프에 빠졌죠. 당시엔 이 영화를 나 혼자 다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던 것 같아요. 영화를 만들기 위해 함께 해주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간과했었어요.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을 때, 기운이 났어요. 내가 구속이나 폼을 더 만들기엔 시간적으로 한계가 있는데 내 주위엔 촬영감독님, 연출·미술 감독님 등 이걸 그럴듯하게 만들어주실 분들이 있었던 거죠. 그런 식으로 안도하고 타협해나가면서 촬영을 잘 끝마칠 수 있었어요.”
극 중 주수인과 배우 이주영은 꽤 비슷하다. 외부에서 받는 압력을 고민하기보다 자기 안에서 쌓이는 고민에 더 집중한다. 주위에서 ‘안 된다’고 해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해낼 수 있을지, 스스로 어떻게 실력을 끌어올릴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주수인은 어떻게 하면 구속을 더 올릴 수 있을까에 더 주력하는 인물인 것 같아요. 연기를 해오면서 나 역시 그런 순간들이 있었고, 주변에서 걱정도 했었지만 결국 ‘그래서 나는 이것을 할 수 있나’를 고민하며 나아갔어요. 배우 이주영으로서 보여주지 못한 모습들을 새 작품을 통해 보여줄 수 있고, 나라는 배우를 더 알릴 수 있다면 독립영화든 상업영화든 드라마든 그 장르를 나누진 않았어요. 덕분에 그러면서 실제로도 주수인과 비슷한 지점들을 찾아가며 연기할 수 있었어요.”
극 중 주수인은 프로야구 선수가 되는 게 꿈이지만, 실제 배우 이주영의 꿈은 ‘현재를 충실히 보내는 것’이다. 주변에서는 벌써 꿈을 이뤘다고, 잘된 것 아니냐고 말하지만 그는 아직 잘 모르겠다는 눈치다.
“이제 출발하는 느낌인 것 같고, 제가 여태까지 해왔던 건 작은 부분이었어요. 못해본 게 너무 많아요. 못 해본 역할-작품, 못 만나본 배우-감독들이 훨씬 많기에 하나하나 해 나가다 보면 뭔가 버킷리스트처럼 같이 작업하고 싶은 감독이나 배우, 작업할 기회도 올 거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하루하루 현재를 충실하게 살고 있어요. 지나간 과거도, 앞으로 올 미래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 아니라서 거창한 꿈이라고 할 건 없는 것 같아요.”
‘야구소녀’ 이후 그는 특별한 목표를 정하기보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앞으로도 ‘배우 이주영’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작품으로 관객·대중들과 만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어떤 일이든 계획하거나 의도된 대로 펼쳐지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이 일을 하면서 ‘꼭 올해 무엇을 이뤄서 내년엔 어느 정도까지 가 있어야 된다’든지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우친 것 같아요. 매 순간의 선택에 저를 맡길 것 같아요. 대신 꾀를 부리고 살지는 않을 거에요. 지금처럼 배우로서 영화를 홍보하고, 관객들과 만나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며 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