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광(사진) 롯데문화재단 대표의 집무실 한쪽 벽엔 커다란 화이트 보드가 붙어 있다. 그 위를 빼곡하게 채운 것은 롯데콘서트홀 무대에 오를 1년 치 공연 스케줄이다. 월별 일정이 각기 다른 색깔로 구분된 표의 정 중앙은 그러나 ‘하얀 구멍’처럼 텅 비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상반기 주요 공연이 취소된 탓이다. 남은 일정도 마냥 장담할 수는 없는 상황. 그럼에도 김 대표는 “공연장은 관객이 찾아올 때 비로소 존재의 가치가 살아난다”며 “음악은 계속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불확실성 속에서도 하반기 여름 음악 축제를 비롯해 관객과의 만남을 묵묵히 준비 중인 김 대표를 롯데콘서트홀에서 만났다.
━
유통맨에서 예술경영으로 '배움의 1년반' 그리고‥
|
김 대표는 지난 2019년 1월 롯데콘서트홀과 롯데뮤지엄을 운영하는 롯데문화재단 수장으로 취임했다. 1986년 롯데쇼핑 입사 후 롯데백화점·마리오 아울렛 등 줄곧 유통 부문에서만 활약해 온 그였기에 김 대표의 롯데문화재단행은 업계의 큰 화제였다. 이 같은 시선이 부담스러울 법도 하지만, 취임 후 “정말 많이 배우고 채워 넣으며” 지난 1년 반을 보냈다. 그는 “함께 일하는 직원들이 모두 이 분야의 전문가들”이라며 “관객의 입장에서 ‘이렇게 해보면 어떠냐’는 제안도 많이 하고, 직원들에게 정말 열심히 묻고 들이댔다”고 웃어 보였다. 전시 부문 지식을 쌓기 위해 대학의 예술문화과정도 등록해 다닐 만큼 강한 열정을 보였다.
심혈을 기울여 내놓은 2020년 기획은 그러나 예상치 못한 악재를 만나 줄줄이 어그러졌다. 해외 아티스트의 내한 공연이 대부분인 롯데콘서트홀은 코로나 19에 따른 타격이 컸다. “대표로 와서 하나하나 배워가며 2021년 공연까지 2년 치 일정을 다 짜두었는데 많이 취소돼 실망이 컸죠. 올 상반기에만 기획과 대관 등 102개 공연이 취소된 상태니…”
불확실성은 여전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더욱 관객과의 만남을 준비해야 한다는 게 김 대표의 생각이다. 롯데콘서트홀은 올 8월을 시작으로 매년 여름 ‘클래식 레볼루션’이라는 음악 축제를 열어 음악 팬들과의 소통에 나선다. 영국 BBC 프롬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스위스 베르비에 페스티처럼 전 국민이 함께 즐기는 여름 음악 행사를 목표로 약 열흘간 다양한 장르의 프로그램을 선보일 계획이다. 김 대표는 영국에 가 직접 BBC 프롬스를 경험하기도 했다. “이 기간에는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클래식 공연을 즐길 수 있어요. 공연장이든 야외 광장이든 사람들이 서서도 듣고, 앉아서도 듣고, 또 누워서도 듣고… 문턱 없이 일상에서 음악을 즐길 수 있더군요. 이런 향유의 자리가 한국에도 꼭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커졌죠.” 클래식 레볼루션이 앞으로 단순히 관객이 ‘듣는’ 자리가 아닌, ‘참여하는’ 자리로 발전하는 방향도 모색하고 있다. 김 대표는 “아티스트만의 잔치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학생 오케스트라나 주부 합창단 등 시민들이 무대에 오를 수 있는 ‘모두의 축제’가 됐으면 한다”며 “앞으로 해를 거듭하며 다양한 변주가 가능한 축제로 거듭났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재단과 김 대표의 고군분투에 명장들도 화답하며 힘을 보태고 있다. 클래식 레볼루션의 예술감독이자 지휘자인 크리스토프 포펜은 “자가격리를 하더라도 입국해 무대에 서겠다”는 입장을 전해왔다. “사실 저희 쪽에서 보장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요. 공항에 도착해 어느 격리 시설로 갈지 모르는 데다 2주간 생활의 불편함을 겪을 수밖에 없잖아요. 이런 상황을 말씀드렸는데도 ‘침대와 책상, 인터넷만 있으면 된다’고 말씀해주시니 정말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같은 달 원 코리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무대에 오르는 지휘자 정명훈도 ‘자가격리도 기꺼이 하겠다’며 공연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고.
김 대표가 롯데문화재단에 오면서 큰 목표 잡은 것은 ‘모두에게 친숙한 공연장’이다. 올해 4월 예정됐던 ‘체리블러썸 축제’도 벚꽃 철 석촌 호수 일대에서 공연을 펼치고, 롯데콘서트홀을 개방해 시민들에 한 걸음 다가서려는 의도에서 기획한 행사였다. 비록 올해는 코로나 19 탓에 시작조차 하지 못했지만, 내년에는 국내 아티스트를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짜 시민들과 만날 계획이다.
모든 게 관객이 있을 때 비로소 빛나는 것들이다. 손도 못 쓴 채 날려버린 상반기는 무대와 객석, 그리고 교감의 소중함을 어느 때보다 절실히 느낀 시간이었다. 그래서 곧 다가올 하반기는 더욱 간절하다. “위기 속에서도 공연장의 철저한 방역과 관객의 놀라운 시민의식은 빛났습니다. 이제 멈췄던 음악이 다시 이어져야 합니다. 현장이 주는 감동은 그 어떤 것으로도 재현할 수 없어요.”
/송주희기자 ssong@sedaily.com 사진=성형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