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영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과 동맹국으로 싸운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성공 소식을 들은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의 말에 답이 있다. “그렇다면 이제 소련이 필요없는 것 아닌가?” 나치 독일을 상대하기 위해 소련이 필요했다는 얘기다. 소련의 군사력은 외형상 어느 군대 못지않았다. 나름대로 전쟁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1939년부터 1941년 6월22일 독일의 전격적인 침공 직전까지 소련은 항공기 1만8,000여대를 생산해 전선에 깔았다. 독소전쟁 개전 직전 소련 육군이 보유한 전차는 2만4,000여대에 이르렀다.
막상 두 전체주의 국가인 독일과 소련 간 전쟁이 터지자 붉은 군대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개전 6개월 만에 소련 육군은 전차의 80%를 잃었다. 장비의 성능과 운용능력에서 독일군에 못 미친 탓도 있지만 가장 큰 오류는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있었다. 독일의 침공 징후에 관한 보고를 묵살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판단을 못 내리던 스탈린이 그나마 올바르게 선택한 것은 세 가지. 미국과 영국의 원조를 받아들이고 모스크바 사수를 위해 끝까지 크렘린궁을 지켰으며 산업시설을 재빨리 동쪽으로 빼돌렸다.
독소전쟁 개전 이틀 뒤 전시시설 대피 계획을 짜고 1941년 6월30일 국가전쟁위원회를 만들어 위원장을 맡아 군수공장 이전 명령을 내렸다. 독일 공군 폭격기의 작전 반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우랄산맥 동쪽으로의 군수공장 이전은 산업사의 수수께끼로 꼽힐 만큼 광범위하고 빠르게 이뤄졌다. 11월까지 이전된 대형 군수공장만 1,503개. 연 92만3,000량의 화차와 수많은 우마차가 나치 공군의 주간공습을 피해 밤새워 설비를 실어날랐다. 우랄산맥 동쪽에 급조된 천막공장들은 놀라운 성과를 냈다.
1941년 하반기 우랄 전시산업의 전차 생산량은 4,177량. 1942년 상반기에는 1만1,021량으로 늘었다. 1942년 중반 이후 소련은 주요 병기의 수량은 물론 성능에서도 독일을 앞질렀다. 우랄뿐 아니라 모스크바 근교의 생산력도 회복된 덕분이다. 미국과 영국의 원조 물자가 승리에 기여한 것도 사실이지만 종전까지 소련은 전차 및 자주포, 각종 야포, 개인화기 생산에서 세계 1위를 기록했다. 여자와 10대를 포함한 수많은 노동자들은 자발적으로 하루 10시간 이상 조국을 구할 무기를 만드는 데 매달렸다. 독일은 어리석었다. 슬라브인을 깔보고 학살을 자행하는 통에 공산주의를 싫어하던 사람들마저 ‘침략자를 물리치기 위한 전선과 공장’에서 싸우게 만들었으니까.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