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간 국내 대기업에 휴대폰 부품 등을 납품해온 우량 중소기업 ‘일야’가 가파르게 오르는 인건비 부담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공장 문을 닫았다. 경쟁업체들처럼 베트남 등으로 공장을 이전했다면 극단적인 상황을 피할 수 있었지만 ‘메이드인코리아’를 고집하며 국내에서 공장을 가동하다 이런 결과를 맞은 것이다.
29일 한국산업단지공단 등에 따르면 인천 남동공단에 위치한 일야는 지난 17년간 대기업에 휴대폰 부품 등을 납품해오다 25일 생산을 전면 중단했다. 산단공에는 공장을 처분하겠다고 신고했다. 관련 제조사업의 폐업을 결정한 것이다. 1978년 서울 구로구에서 창업한 지 40여년 만이다. 한때 연매출 700억원을 넘겼고 2018년에는 최우수협력사로도 선정된 우량회사였다.
2016년에는 대기업의 자동차부품 사업 확대로 일야가 전장램프 납품업체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컸다. 해당 대기업이 휴대폰 국내 생산을 중단하고 베트남으로 공장을 이전해도 일야는 국내 공장을 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베트남행을 포기했다. 그러자 국내 수주량은 급감했다. 여기에다 급격히 오르는 인건비는 직격탄이 됐다. 지난해에는 전장램프 사업마저 위기를 맞았다. 2016년 729억원이었던 연 매출이 2017년 428억원, 2018년 287억원으로 줄더니 지난해에는 278억원으로 쪼그라들었다. 적자폭도 2017년 31억원에서 2018년 42억원, 지난해에는 44억원으로 불어났다.
일야는 뛰는 인건비를 도저히 맞추지 못해 40년 제조업을 정리하고 외식사업으로 전환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인건비 급증이 멀쩡한 제조업을 외식사업으로 내몬 결과가 됐다. 그마저 남은 제조사업은 베트남이나 중국 지역의 다른 공장으로 옮길 예정이다. 일야 측은 “인건비 상승에 따른 수익성 악화로 직접 제조업을 하는 데 한계에 봉착했다”고 밝혔다.
한때 연매출 700억 우량기업의 몰락 |
대기업이 해외로 생산공장을 이전하면서 일야처럼 국내 수주량이 줄고 인건비 부담을 이기지 못해 폐업하는 제조업체들이 속출하고 있다. 대기업 1차 협력업체마저 문을 닫는 지경이어서 2·3차 협력업체들의 위기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최저임금을 심의·의결하는 사회적 대화기구인 최저임금위원회가 이날 오후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렸지만 이런 위기감에 공감하는 분위기는 없었다.
중기중앙회와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중소기업 600개사를 대상으로 ‘중소기업 고용애로 실태 및 최저임금 의견 조사’를 실시한 결과 88.1%가 최저임금 동결 또는 인하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경영계는 내년도 최저임금을 동결 또는 삭감하거나 업종별로 임금지급 능력이 다른 만큼 최저임금에도 차등을 둬 사용자의 부담을 줄여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내년도 최저임금 요구안으로 올해보다 25.4% 오른 1만770원을 내놓았고 한국노총은 ‘국민의 눈높이를 고려한 인상안’을 내겠다고 밝히면서도 내년도 최저임금의 최초요구안을 제출하지 않았다.
최저임금 심의는 노사의 요구안을 놓고 차이를 좁혀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최초요구안이 나오지 않으면서 장기간 공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중소기업들은 최저임금이 오를 경우 44.0%가 신규 채용을 축소하고 14.8%가 감원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중소기업의 절반 이상(58.8%)이 최저임금 인상 시 고용을 축소해야 한다고 답한 것이다.
일부에서는 매년 오르는 인건비가 리쇼어링(해외 진출 기업의 국내 회귀)을 더 어렵게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26일 중소기업중앙회가 12~22일 중국과 베트남에 현지법인을 소유한 중소기업 200곳을 대상으로 리쇼어링 계획을 물은 결과 돌아올 의향이 있다는 기업은 8%에 불과했다.
반면 ‘현지사정이 악화되면 고려하겠다’는 기업(16%)과 ‘의향이 없다’는 기업(76%)은 92%에 달해 이로 미뤄볼 때 중소기업은 리쇼어링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돌아올 계획이 없는 이유로는 ‘국내 생산비용이 높다’는 답변이 63.1%로 대다수였다. 이어 ‘현지 내수시장 접근성(25%)’ ‘현지 원청기업과의 관계(23%)’ ‘노동·환경 등 국내 각종 규제(9.9%)’ 순이었다.
한편 노사는 최저임금 요구안을 제시해달라는 최저임금위원회의 요청에 모두 응하지 않았다. 최저임금 심의 법정 시한은 이날이지만 최초 요구안조차 감감무소식인 셈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경제가 악화하는 상황에서 노사가 지나친 힘겨루기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저임금위원회는 이날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3차 전원회의에서 근로자·사용자위원의 최초 요구안을 받아 내년도 최저임금 심의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양측 모두 요구안을 제출하지 않았다. 이날은 고용노동부 장관이 심의를 요청한 지 90일이 되는 날로 최저임금법이 정한 ‘법정 심의기간’의 마지막 날이다. 결국 올해도 법정 심의 기한을 넘긴 것이다.
요구안을 제시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노사는 서로 ‘네 탓’을 하며 신경전을 이어갔다. 노동계 관계자는 “사용자위원 측에서 제출할 요구안을 ‘동결’로 예상하고 노동자위원 요구안을 준비했지만 최근 ‘삭감’ 안을 추진한다는 이야기가 들려 금일 제출은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재계 관계자는 “현재 마이너스 인상률도 검토되고 있는 것은 맞다”면서도 “요구안을 함께 제시하기로 했는데 이를 어긴 것은 근로자위원 측”이라고 선을 그었다.
근로자위원·사용자위원은 모두발언에서 ‘인상’과 ‘동결 내지 삭감’을 놓고 신경전을 이어갔다. 근로자위원 간사인 윤택근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직접 “경영계가 십여년 동안 보여온 동결 내지 삭감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 선행과제”라며 “노동자의 삶을 외면하지 말아 달라고 경영계에 거듭 요청드린다”고 말했다. 사용자위원 간사인 이태희 중소기업중앙회 스마트일자리본부장은 “근로자도 어렵지만 중소 영세기업들은 생존의 사투를 벌이고 있다”며 “이런 현장의 절박한 사정을 헤아려 (최저임금을) 심의해달라”고 했다.
노사 네탓 공방만…도 넘은 최저임금 힘겨루기 |
노사의 ‘최저임금 눈치 게임’이 격화되면서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최저임금 요구안 동시 제출’이라는 관례가 흔들릴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지난해 사용자위원들은 최저임금 차등화가 무산된 후 이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최저임금위원회를 보이콧했다. 그 사이 근로자위원들은 ‘1만원’ 인상안을 단독 제출하며 사용자위원의 복귀를 압박한 바 있다. /세종=변재현기자 이재명기자 humbleness@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