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그룹이 회사채 대신 장기 기업어음(CP)으로 조달책을 선회했다. 오너리스크가 한창이던 지난 2017년 이후 3년만이다. 올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직격탄을 맞아 현금흐름과 재무구조 개선 전망이 불투명해진 만큼 평판 노출을 줄여 신용 리스크를 최대한 덜려는 의도다.
9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롯데쇼핑(023530)과 호텔롯데는 각각 이달 14일과 20일 단기금융시장을 찾아 장기 CP를 발행할 예정이다. 롯데쇼핑은 2,000억원 규모로 3년 만기물을 발행한다. 올해 말 만기가 돌아오는 1,500억원 차입금 상환과 운영자금 확보 목적이다. 호텔롯데는 이달부터 10월까지 만기가 돌아오는 단기CP 상환을 위해 2.5년 만기로 3,000억원을 조달한다.
일반적으로 CP와 전단채(전자단기사채)는 주로 기업들의 단기 자금 조달용이다. 만기가 1년 이내일 경우 증권신고서 제출이 면제되는 등 발행 절차가 간편하기 때문이다. 대신 회사채 대비 금리가 높고 이자를 일시불로 지급해야 하는 등 발행사의 금융비용 부담이 크다. CP는 매달 이자를 지급하는 회사채와 달리 할인율을 적용해 발행 금액에서 만기 때까지 선이자를 미리 차감한다.
이날 기준 롯데쇼핑과 호텔롯데의 자기등급(AA) 회사채 민평금리는 3년물과 2년물 각각 1.482%, 1.349%다. 자기등급 민평금리는 민간 채권평가사들이 평가한 같은 신용등급 기업들의 평균 금리를 의미한다. 롯데쇼핑은 이번 발행에서 할인율을 연 2.161%로 제시해 회사채 대비 67bp(1bp=0.01%포인트) 높아졌다. 연 2.1% 할인율을 제시한 호텔롯데는 75bp가 벌어졌다. 회사채와 달리 선이자를 미리 떼는 만큼 시간흐름에 따른 실효금리를 감안하면 비용부담은 더 늘어날 예정이다. 만기가 1년 이상인 만큼 증권신고서 제출도 의무다. 사실상 회사채만큼 번거롭고 금융비용은 오히려 늘어나는 셈이다.
발행사에게 여러모로 불리한데도 불구하고 롯데그룹이 회사채 대신 장기CP를 선택한 것은 회사채 미매각에 따른 신용리스크를 피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공모 회사채의 경우 발행 전 시장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수요예측 절차가 필수다. 이 과정에서 회사에 대한 시장의 평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IB업계의 한 관계자는 “최근 코로나19 사태로 직격탄을 맞은 기업들이 늘어나면서 시장의 비우량채 기피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며 “롯데는 대표적인 유통 그룹으로 향후 현금흐름과 재무구조 개선 전망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고 전했다.
수요예측에서 미매각이 발생하면 추후 회사채 발행에서도 계속 영향을 받는다. 보수적인 기관투자자들의 특성상 기업의 신용리스크를 크게 보기 때문이다. 매일 시가평가가 이뤄지기 때문에 채권 유통가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정적 평판은 부담일 수밖에 없다.
롯데그룹은 신동빈 회장의 재판이 한창 진행되던 지난 2017년 처음으로 장기CP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했다. 당시 신동빈 회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 측에 뇌물을 공여하는 등 국정농단과 경영비리 혐의로 기소됐다. 오너리스크로 평판이 크게 훼손된 롯데그룹은 공모 회사채 시장 발길을 끊고 장기CP와 강제상환조건 등 옵션이 붙은 사모채로 현금 조달 통로를 선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