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만파식적] 비피터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말 영국 런던탑을 지키던 근위대장이 국왕 조지 6세에게 장문의 사죄문을 올렸다. 당시 독일군의 대공습으로 매일 밤 9시52분 정각에 거행하던 성문 폐쇄식이 7분이나 지연됐다며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간청한 것이다. 1078년 런던탑이 세워진 후 단 한 번도 빠짐 없이 이어졌던 의식이 몇 분이라도 늦어진 것은 유례없는 일이었다. 조지 6세는 다친 사람이 없어 다행이라면서 성문 폐쇄 지연이 재발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며 근위대장의 사죄를 기꺼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정복왕’으로 불리는 윌리엄 1세가 런던의 방어와 통제를 위해 템스강 강변에 건설한 런던탑은 1485년부터 헨리 7세의 지시에 따라 별도의 근위병들에 의해 지켜지고 있다. 이 근위병들은 일명 ‘비피터(beefeater)’라고 불렸다. 중세 시절 왕과 함께 식사할 때 원하는 만큼 고기(beef)를 먹을 수 있도록 허용됐다는 데서 이렇게 불렸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비피터는 예로부터 죄수를 감시하고 왕가의 보물을 지키는 역할을 맡아왔으니 영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군대이자 왕실 경호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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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피터의 임무가 막중하다 보니 자격도 매우 까다롭다. 최소 22년 이상의 군 복무 경력을 갖춰야 하고 장기근속 훈장, 선행 훈장 등 수상 이력도 겸비해야 한다. 2007년에는 예비역 육군 준위인 모이라 캐머런이 5명의 쟁쟁한 남성 경쟁자를 제치고 최초의 여성 비피터에 선발돼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2년 후에는 그가 동료들로부터 집단 따돌림을 당한 사실이 밝혀져 남성 비피터들이 해고당하는 등 중징계를 받아야 했다. 얼마 전에는 비피터가 연금 제도 변경에 항의해 전통적인 붉은 제복이 아니라 프랑스 시위대처럼 ‘노란 조끼’를 입고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비피터들이 530년 만에 처음으로 집단 해고 위기에 직면했다는 소식이다. 37명의 비피터들은 런던탑 경비와 함께 안내 및 해설 역할까지 맡아왔지만 최근 국내외 관광객이 급감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왕실의 파수꾼이자 멋진 관광 가이드로 활동해온 비피터의 얼굴에 웃음꽃이 다시 피기를 기대한다. /정상범 논설위원

정상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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