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만파식적]로멜 장군

‘독일의 전쟁 영웅’ 에르빈 로멜(1891~1944년)은 독일 남부 소도시 하이덴하임의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나 군사학교를 다녔다. 1917년 산악부대 중대장이었던 로멜은 약 150명의 병력으로 천혜의 요새인 알프스 마타주르산에서 이탈리아군 1만여명과 마주했다. 약 9,000명을 포로로 생포하는 대승을 거둬 당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로부터 최고 훈장까지 받았다. 1941년 로멜이 이끄는 기갑부대는 아프리카 땅을 밟았다. 로멜은 기습 공격으로 영국군을 초토화시켰고 영국군 장군을 포로로 잡는 전과까지 올렸다. 하지만 물자 보급이 끊기며 어려움에 봉착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로멜은 전진을 택했다. 리비아 국경 지대로 향하는 300대의 영국 전차부대에 80대의 전차로 맞서 대승했다. 영국군은 그에게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을 붙여 경외감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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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존경받는 군인이기도 했다. 대치 중이던 영국군의 야전병원에 식수가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뒤 장갑차에 백기를 달아 식수를 전달했고 영국군이 답례로 와인을 보냈다고 한다. 전투가 끝나면 부상자들을 돌봤고 병사들과 똑같은 전투 식량을 먹으며 야전 침대에서 함께 잠을 잤다. 하지만 1944년 ‘작전명 발키리’로 유명한 히틀러 암살 사건에 연루돼 게슈타포에 체포된 후 반강제적으로 청산가리 독약을 먹고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장례식은 성대하게 거행됐다. 로멜이 암살 공모에 가담했는지를 두고 의견은 분분하지만 “국가의 기본 토대는 정의이며 학살 행위는 크나큰 범죄 행위”라고 말했다는 일화는 그의 선택을 미뤄 짐작하게 한다.


미국의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을 계기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수천 명의 지뢰 피해자를 낳은 로멜의 기념비를 없애자는 목소리가 커졌다. 고심을 거듭한 하이덴하임시는 로멜의 기념비를 그대로 두되 그 앞에 목발을 짚고 있는 지뢰 피해자를 상징하는 조각상을 세웠다. 로멜의 공과를 상징하는 조각물이 함께 서 있게 된 것이다. 역사의 일부분이 부정되고 공격받는 요즘 같은 때 독일 소도시의 선택은 분열과 혐오의 틀에 갇힌 현대인들에게 적지 않은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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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정 논설위원

*흔히 알고 있는 에르빈 롬멜의 국립국어원 공식 표기법은 ‘에르빈 로멜(Erwin Johannes Eugen Rommel)’입니다. 다수의 저서와 보도에서 롬멜로 표기됐지만, 서울경제신문은 국립국어원의 표기법에 따라 로멜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정민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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