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833년 윌리엄 윌버포스 별세

역사 물꼬 바꾼 위대한 평신도




체구가 작은 10세 이하 아이들이 굴뚝청소부로 일하다 타죽는 나라. 수도 미혼 여성의 25%가 매춘을 하고 사망자의 8분의 1이 알코올 중독인 나라. 도덕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사회. 18세기 초반 영국의 민낯이다. 산업혁명으로 부를 축적한 상류층의 부패와 타락은 더 심했다. 왕실 예산의 절반가량이 왕세자(훗날 조지 4세)의 엽색 행각에 들어갔다. 물질만능주의 속에 의원직과 군 장교 지위도 사고팔았다. 오죽하면 초기 사회주의자들이 최초로 공산화할 수 있는 나라로 영국을 꼽았을까.


빅토리아 시대(1837~1901)로 접어들 즈음, 영국 상류 사회와 정치권의 분위기는 싹 바뀌었다. 도덕과 절제, 솔선수범과 자선이 시대 정신으로 자리 잡았다. 상류층이 변하며 사회 전체가 바뀌고 영국은 최전성기를 맞았다. 영국 정치권을 바꾼 동력은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로 상징되는 ‘클래펌 공동체(Clapham Sect)’에서 나왔다. 대부분 부유한 복음주의자(감리교)였던 이들은 익명으로 재산을 바쳐가며 사회변혁을 이끌었다. 윌버포스는 거금 8,000파운드를 뿌려 21세(1780)에 하원의원에 당선된 신예 정치인. 3년 뒤 24세 나이에 영국 총리에 오른 대학 동기 윌리엄 피트보다 정계 입문이 1년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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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웅변술 덕분에 총리 재목으로 꼽히던 그는 방탕한 생활을 빠졌다가 20대 중반에 인생 전환점을 맞았다. 영성을 느끼고 신의 뜻에 따라 살겠다고 다짐한 것. 의회는 국가의 도덕을 만들어내는 조폐국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 아래 각종 법안을 만들었다. 고위공직자의 과도한 음주와 사창가 출입 등 비도덕적 행위를 고발할 수 있는 법이 이때 생겼다. 자연스레 미운털이 박혔다. 국가 수입의 3분의 1이 노예무역으로 충당되던 시절, 윌버포스는 암살 위기도 두 번 겪었다. 억압에 맞선 그는 법안을 11번이나 발의한 끝에 1807년 노예매매금지법을 만들었다. 하늘의 뜻에 반하는 노예제도는 결국 서구 문명의 붕괴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호소가 먹힌 것이다.

1833년 영국의회는 노예 해방령을 내려 식민지의 노예 8만 명이 자유를 얻었다. 병상에서 기쁜 소식을 들은 지 사흘만인 7월 29일 새벽, 그는 편하게 눈을 감았다. 시민의 자유와 언론을 억압하고 11명이 희생된 피털루 학살 진상 규명에 반대했다는 반론이 최근 나오지만 윌버포스는 여전히 추앙받는다. ‘종교적 신념에 따라 역사의 물꼬를 바꾼 위대한 평신도’로. 모를 일이다. 한국에는 존경받는 보수주의자가 왜 없는지….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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