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51년 11월 미국, 프린스턴대와 다트머스대의 미식축구 경기가 열렸다. 프린스턴대 쿼터백의 코뼈가 부러질 정도로 과열된 경기. 난투극 속에 다트머스대 선수 한명은 다리가 부러졌다. 승리는 프린스턴이 가져갔다.
심리학자 몇 명이 이 경기 영상을 각 대학의 학생들에게 보여줬다. 같은 경기 영상을 봤지만 양측 학생의 반응은 달랐다. 프린스턴대 학생들은 다트머스대 팀이 10회 가까운 반칙을 했다고 평가했다. 반대로 다트머스대 학생들은 자기 선수들의 반칙 횟수가 5회를 넘지 않는다고 봤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세상을 보고 해석하려 한다는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은 이 실험을 통해 확인됐다.
확증편향은 극단으로 치닫는 집단사고의 출발선인 탓에 위험하다. 오직 나의 신념과 행동만이 바른길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과 그런 개인들이 끼리끼리 모여 ‘우리 편이 아니면 모두 적’이라는 집단극단화의 폐해를 숱하게 목격하고 있다.
캐스 선스타인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는 “자기 생각에 확증을 갖는 경우 사람들의 생각은 보다 극단적으로 바뀌고 다른 사람들이 동조할 때 더 극단적인 쪽으로 움직인다”고 설명한다(‘우리는 왜 극단에 끌리는가’).
그런데 문재인 정부가 이 확증편향에 빠져 있음을 나는 너무 늦게 알게 된 듯하다. 돌이켜 보면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취임사에서 주택 거래 데이터를 들이대며 ‘다주택자들과의 전쟁’을 선포했던 2017년 6월, 그 무렵에 알았어야 했다.
문재인 정부는 집값 상승의 주범이 오직 다주택자들이라는 왜곡된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주택자=투기꾼=적폐’라는 프레임에 갇힌 탓에 22회 나온 부동산 정책의 대부분은 증세에 집중됐다. 그 투기꾼들 중 일부는 청와대를 포함한 범여권에 두루 포진해 있었고 이제야 마지못해 집을 내놓기 시작했다. 정권 출범 3년여 만의 일이다.
더 일찍 알아챘을 수도 있다. 그 해 5월, 취임 3일째인 대통령이 인천공항공사를 찾아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열겠다”고 선언했을 때 취준생들이 겪게 될 박탈감은 그들의 안중에 없었던 듯 보인다. 어쩌면 ‘인국공 사태’에 좌절하는 젊은이들조차 적으로 구분 짓는 심각한 편향이 대자보를 써 붙인 대학생에게 벌금형을 내렸는지 모를 일이다.
여권 출신의 지방자치단체장들이 권력을 앞세운 성폭력으로 줄줄이 감옥에 가고, 조사를 받고, 유명을 달리할 때 문재인 정부 인사들의 속내는 무엇이었을지 궁금하다. 아무리 편향됐다고 하더라도 ‘관노’니 ‘꽃뱀’이니 하는 망상이 그들의 머릿속에 있었을 거라 믿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내 편’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이상한 속성이 ‘피해 호소인’이라는 해괴한 신조어까지 만들어낸 것은 분명하다.
세계 최대 시민단체 아바즈를 창립한 엘리 프레이저는 사람들이 점점 자신만의 편협한 정보 세계에 빠지는 현상을 ‘필터 버블’이라고 칭했다. 내 입맛에 맞는 정보만이 수용되는 버블 속에 갇혔다는 의미인데 그는 필터의 기능을 하는 것이 개인화가 갈수록 정교해지는 인터넷 검색 엔진이나 플랫폼이라고 말한다(‘생각 조종자들’).
‘버블’ 속의 정부, 그 필터링은 무엇이 하는 걸까. 편향된 정보와 해석만을 취하는 여권의 정치인과 그 코드를 맞추기 위해 헌신하는 공직자, 그들이 뭉쳐 만들어내는 위험천만한 집단사고가 아닐까.
그렇게 3년 동안 독선을 거듭한 여당에 ‘태극기’의 프레임에 갇혀 176석을 내준 야당의 어이없는 모습을 본 게 석 달여 전이다. 그래서 정부와 여당의 최근 행보는 노골적이다 못해 폭주하고 있지만 그들 역시 버블 밖으로 나오지 못하면 참담한 결과를 피해갈 수 없다. 조각 난 대한민국,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는 이쯤으로 족하다. june@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