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 1914년 비행선 첫 전략폭격

전선·도시 구분 사라져… 민간 피해 속출

비행선을 동원한 도시에 대한 무차별 야간폭격은 무고한 시민의 희생을 가져왔다. 그림은 독일 비행선의 1914년 바르바샤 폭격 장면./위키피디아비행선을 동원한 도시에 대한 무차별 야간폭격은 무고한 시민의 희생을 가져왔다. 그림은 독일 비행선의 1914년 바르바샤 폭격 장면./위키피디아



1914년 8월 6일 새벽, 벨기에 리에주 상공. 어두운 하늘에 나타난 거대한 비행선이 폭탄을 뿌렸다. 독일은 침공 4일이 지나도록 벨기에군의 완강한 저항에 막히자 육군 소속 비행선 제펠린 21호(제식명은 Z-Ⅵ)를 띄워 리에주 요새 부근에 대한 무차별 폭격에 나섰다. 첫 야간 공습의 희생자는 9명. 모두 민간인이었다. 무차별 야간 폭격은 전쟁의 양상을 뒤바꿔 놓았다. 전선의 군인들끼리 싸우고 후방의 도시와 시민은 안전했던 시절이 저물고 모두가 위험에 노출되는 시대를 맞았다.


리에주를 폭격했던 비행선은 대공 사격에 피격돼 쾰른 상공 부근에서 추락했으나 독일은 오히려 비행선 폭격을 늘렸다. 8월 말과 9월 초에는 벨기에 최대 도시인 앤트워프가 야간 폭격을 맞았다. 벨기에 폭격은 예고편이었다. 비행선 전력에서는 압도적 우위를 갖고 있던 독일은 이듬해부터 영국에 대규모 비행 선단을 보냈다. 비행선은 속도가 느렸으나 장점도 많았다. 용적이 커 많은 폭탄을 실을 수 있는데다 전투기가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고도의 상공을 날 수 있었다. 연료 소모도 적었다. 독일은 막강한 영국 해군을 피하는 수단으로 비행선 전략폭격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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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법 장치도 없고 조준도 육안이었으나 대도시의 불빛은 형광 표적지나 다름없었다. 등화 관제를 실시해도 첫 폭탄을 떨군 후 화재로 드러나는 실루엣을 겨냥하는 폭격에 도시는 무방비였다. 1차대전 기간 중 독일이 영국 상공에서 운영한 84척의 비행선에서 투하한 폭탄은 약 5,000발. 557명이 죽고 1,358명이 부상을 당했다. 재산 피해는 약 150만 파운드. 어두운 하늘에 드리우는 비행선이 안겨주는 심리적 공포는 런던을 짓눌렀다. 영국은 전선에서 고고도 전투기 100대를 빼내 본토 방공에 배치하고 전투기의 상승 성능을 끌어올려 독일에 맞섰다. 독일은 비행선 30여 척을 격추 또는 사고로 상실하자 1917년 이후 폭격 수단을 고타 폭격기로 바꿨다.

폭격기에 의한 피해는 더 컸다. 폭격기가 투하한 11만 1,935㎏의 폭탄으로 인해 사망자 835명, 부상 1,972명이라는 인명 피해를 냈다. 영국은 독일 도시에 대한 보복 폭격도 단행했다. 교전국들은 도시의 민간인에 대한 폭격을 금지한 1907년 헤이그 협약과 국제해군조약을 휴지 조각으로 여겼다. 문명에 대한 야만적 폭력으로 비난받던 전략폭격은 2차 세계대전에서 더욱 기승을 부렸다. 수십 만 명의 시민들이 폭격으로 영문도 모른 채 집에서 죽었다. 지금은 안전할까. 전략폭격기를 유지하는 나라는 하나같이 세계의 ‘지도 국가’들이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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