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에 도전한 가운데 일본 정부가 자국 언론을 통해 불편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강제징용 판결에서 비롯된 수출규제를 놓고 WTO에서 공방을 벌이는 중에 유 본부장이 수장 자리에 오르면 “일본의 골칫거리가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본격적으로 견제에 나서면 유 본부장의 행보에 다소 제동이 걸릴 것이란 우려가 나옵니다.
하지만 일본의 행태가 유 본부장 당선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적잖습니다. WTO 최대 주주인 미국이 어떤 후보를 지지할지가 가장 큰 변수라는 것입니다.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른 아프리카 후보들의 단일화 여부에 따라 선거 판도가 뒤흔들릴 것이란 분석도 있습니다. 다른 변수에 견주면 일본의 몽니는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란 얘기인데요.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일본 정부는 지난달 유본부장이 도전하는 WTO 사무총장 선출에 관여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가지야마 히로시 경제산업상은 당시 정례 기자회견에서 “코로나19 대응과 WTO 등 (사무총장은)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인지가 중요하다”며 “그런 관점에서 일본도 선출 프로세스에 확실히 관여해나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일본 정부가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는 뒤이은 언론 보도를 통해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일본 총리관저의 한 관계자는 “일본이 유 본부장을 지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일본 외무성의 한 간부는 “공평·중립성이 담보될지에 대한 불안이 있다”는 의견을 내놨다고 합니다.
WTO 사무총장은 164개 회원국의 의사를 물어 결정합니다. 일본이 직접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명목상 한 표 뿐이지만 국제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특히 동남아시아처럼 일본과 경제적 유대 관계가 깊은 지역의 국가를 우군 삼을 가능성도 적잖습니다.
다만 전문가들은 “(일본의 행태를) 그렇게 심각하게 볼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일본이 WTO를 포함한 국제 무대에서 미국과 다른 의견을 낸 적이 극히 드물기 때문입니다. 당장 전달 열린 WTO 분쟁해결기구(DSB) 회의록만 봐도, 상소기구 이슈를 비롯한 주요 이슈에서 일본은 미국과 꼭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차기 사무총장 선거에서도 좋든 싫든 미국이 지지하는 후보를 밀어줄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판단입니다. WTO에서 수년간 근무했던 전직 관료는 “일본 정부는 언론을 통해 우회적으로 메시지를 흘리고 있을 뿐, 어떤 후보를 지지할지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며 “미국의 의중을 파악하기 전에 자신들의 의견을 공식화하는 게 조심스럽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번 선거에 정통한 한 인사도 “유 본부장이 수장이 되는 것을 막고 싶으니 언론을 통해 조심스레 목소리를 내는 것 일 뿐”이라며 “미국이 한국을 밀어준다면 일본도 결국 따라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떤 나라의 후보를 밀어줄까요. 외신 등에서 유력 후보로 분류되는 인사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4일 차기 사무총장에 출사표를 던진 8명의 후보 가운데 나이지리아에서 외무·재무장관을 지낸 응고지 오콘조-이웰라, 케냐 문화부 장관을 지낸 아미나 모하메드 전 WTO 총회 의장이 외교가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헌데 이들이 미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미국은 중국 등이 WTO에서 개발도상국 지위를 이용해 부당한 혜택을 누리고 있다며 현 체제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를 막기 위해 중국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줄 개도국 후보를 찾고 있습니다. 미국으로선 중국 편을 들 후보만은 막고 싶을 테지요. 헌데 중국이 지지할 후보로 거론되는 인사가 바로 아프리카 출신 후보들입니다.
물론 아프리카 후보들이 “미국의 우려는 우리가 처한 현실(모하메드)” “미국의 WTO 비판에 동의한다(오콘조-이웰라)”이라며 미국의 눈에 들만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이 아프리카에 대규모 투자를 해오면서 양측이 경제적으로 끈끈한 유대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 미국 입장에선 탐탁치 않을 것 같습니다.
이에 비교적 미국과 가까운 한국(유 본부장)과 영국(리엄 폭스 전 국제통상부 장관) 후보가 미국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 나옵니다. 헌데 리엄 폭스 전 장관의 경우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주도한 인물이라 유럽연합 등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해 경쟁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에 미국이 결국 한국 후보를 선택하게 될 것이란 기대가 조심스레 나옵니다.
일본으로선 생각하고 싶지 않은 시나리오일 테지요. 물론 교도통신 등은 일본 정부가 WTO 사무총장 후보들 가운데 나이지리아 또는 케냐 출신자 중 한쪽으로 좁혀 지지하는 방향으로 조율 중이라고 복수의 일본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보도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을 일본이 할리 없다는 게 정부 안팎의 평가입니다.
/세종=김우보기자 ub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