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 1954년 쑨리런 사건

34년 감금 당한 국민당군 명장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와 만나는 쑨리런 장군. 그를 대면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 조지 패튼 장군도 쑨 장군을 중국 최고의 명장으로 꼽았었다.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와 만나는 쑨리런 장군. 그를 대면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 조지 패튼 장군도 쑨 장군을 중국 최고의 명장으로 꼽았었다.



칠불(七不). 대만 총통 장제스가 쑨리런(孫立人) 장군에게 내린 조치다. ‘죽이지 않겠다. 심문하지도 묻지도 않고 판단하거나 체포하지도 않겠다. 또한 풀어주지도 않겠다(不殺 不審 不問 不判 不? 不關 不放).’ 대외적으로는 총통부의 짧은 발표(1954년 8월20일)만 있었다. ‘부하들의 용공반란 혐의에 연루된 쑨 장군의 직위를 박탈한다.’ 장제스 총통은 죽을 때(1975년)까지 그를 풀어주지 않았다. 장제스를 승계한 장징궈 총통도 마찬가지. 장징궈가 사망한 1988년 이후에야 쑨리런은 조명을 받았다.

저마다 ‘쑨 장군의 명예를 되찾아주자’고 외쳤다. 국방장관이 찾아오고 언론도 연일 특집을 실었다. 어떤 사람이었기에 그랬을까. 스포츠 스타였고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의 영웅이었다. 1900년 태어난 그는 칭화대 토목과 재학 시에는 농구에 심취해 중국 대표로 극동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적도 있다. 미국 퍼듀대 토목과와 버지니아군사학교를 마친 그는 귀국해 국민당군에 입대, 상하이전투에서 이름을 날렸다.


버마 원정군을 이끌고 일본군 1개 대대를 격멸하며 영국군 사단 전체를 구해 동양인 최초로 영국 왕실의 제국훈장까지 받았다. ‘동양의 로멜’로도 불렸다. 국공내전에서 공산군을 궤멸 직전까지 몰고 가던 중 갑자기 임지가 후방으로 바뀌었다. 장제스의 인사 의도는 간단하다. 황푸군관학교 출신 제자 중심인 직계 파벌을 챙기기 위해서다. 마오쩌둥은 그의 경질 소식에 ‘가장 무서운 적장이 사라졌다. 이제 동북은 우리 세상’이라며 반겼다. 패망에 몰렸던 공산군은 끝내 대륙을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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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으로 쫓겨난 장제스 정권의 부패에 불만이던 미국은 쑨 장군을 대타로 여겼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그를 일본에 불러들인 뒤 구체적 지원금액까지 제시하며 설득하려 애썼다. 미국의 쿠데타 제의를 단칼에 거절한 그는 귀국해 사실을 알렸다. 장제스는 기뻐하기는커녕 이를 갈았다. 아들 장징궈를 시켜 용공사건을 조작해 쑨 장군을 내쳤다. 결국 장씨 부자가 죽은 뒤에야 풀려났다. 정치권도 34년 만에 돌아온 영웅을 뻔질나게 찾아갔다.

장제스의 이면을 들춰달라는 부탁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리 어려움을 겪었더라도 상관의 허물을 말하는 것은 부하의 도리가 아니다.’ 90세 생일 직전 죽을 때까지 그는 신념대로 살았다. 리더로서 편협한 면도 있었다지만 권력을 순순히 내놓고 원한까지 삼키며 지조를 지켰던 그는 존경받는 어른이자 군신(軍神)으로 기억된다. 장제스가 파벌 때문에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패거리 정치는 대세를 그르친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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