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대책위원장 부임 이후 줄곧 ‘호남 끌어안기’를 강조해 온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대위원장이 지난 19일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아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며 무릎을 꿇고 사죄하자,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엇갈린 반응이 나왔다.
여당 일각에서는 “통합당의 변화에 박수를 보낸다”는 환영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정청래 의원과 이원욱 의원 등은 김 위원장의 진정성을 의심하며 냉소적 시선을 보냈다.
이날 광주를 지역구로 둔 양향자 의원은 김 위원장이 5·18 민주묘지를 찾은 직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5.18과 2.28 모두 헌법에 담읍시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김종인 대표가 5월 광주 영령 앞에 무릎을 꿇었다”며 “황교안 대표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통합당의 변화에 박수를 보낸다”라고 긍정적 평가를 내놨다.
이어 “기왕 변하는 거 확실히 더 나아가자”며 “문재인 대통령님과 김종인 대표님의 영수 회담이 성사됐다. 그 자리에서 광주 5.18과 대구 2.28을 모두 헌법 전문에 담겠다는 논의를 해달라”고 촉구했다. 그러면서 “김종인 대표님의 광주 시민 앞에 용서를 구한다는 말씀이 진심이라 믿는다”며 “그 진심을 우리 후손들이 길이길이 느낄 수 있도록 차제에 허심탄회하게 개헌 물꼬를 터주시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반면 허윤정 민주당 대변인은 서면 논평을 통해 “연일 ‘전광훈 발 코로나19 재확산’으로 확진자가 급증하는 이때, 광주 방문이 화제 전환용으로 비춰지는 건 오해인 거냐”며 “화합을 위한 진정성이 담긴 방문이라면 이제 행동으로 보여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무릎 꿇는 모습 대신 5·18특별법부터 당론으로 채택하라”며 “충혼탑 앞에서 울먹이는 모습 대신 5·18 진상 규명에 힘써 달라. 국민을 기만하는 게 아니라면 진상 규명과 책임자 소명, 유가족 지원에 대해 초당적으로 협력해 달라”고 촉구했다.
같은 당 정청래 의원 역시 김 위원장의 사과를 ‘빌리 브란트 사과 흉내내기’라고 표현하며 비판의 수위를 높였다.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역사를 훔치지 말라’는 제목의 글을 올린 뒤 “김종인은 잘 알다시피 광주학살의 비극의 씨앗이었던 전두환의 국보위에 참여한 인물”이라며 “전두한 부역자인 셈”이라고 맹폭했다.
정 의원은 “그가 진정 자신의 잘못을 알았다면 전두환의 민정당에도 몸담지 말아야 했고 노태우 정권에도 참여하지 말았어야 했다. 온갖 누릴 것은 다 누리고 이제 와서 새삼 이 무슨 신파극이냐”고 물으면서 “김종인의 참회는 ‘전두환 국보위에 참여한 것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전두환의 후신인 미통당이 정권을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광주 영령들의 소망과는 반대로 가겠습니다’라고 거꾸로 다짐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김 위원장을 향해 “이 분들이 전두환의 손자 정당쯤 되는 당신들의 사과를 진정한 사과라고 생각하겠느냐. 이 분들이 전두환 손자쯤 되는 정당의 집권을 바라겠느냐”고 반문하며 “빌리 브란트는 무릎 사과를 한 이후 정책으로 그 진정성을 실천했다. 그러나 당신의 표 구걸 신파극이 적어도 광주시민들에게는 안 통할 것”이라고 날을 세웠다.
같은 당 이원욱 의원도 “입은 닫은 채 무릎만 꿇는다면 그것이 반성이냐”며 “빌리 브란트 총리는 무릎만 꿇은 게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가로서의 통렬한 반성과 단절이 있었고, 세계 평화와 자유 증진을 향한 실천이 함께했다. 미래를 향한 다짐, 그리고 실천 없는 무릎꿇기는 쇼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강병원 의원도 김 위원장을 향한 비판의 행렬에 가세했다.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김 위원장의 사과는 ‘만시지탄’이라고 꼬집으면서 “‘5·18 유공자는 괴물집단이다, 5·18은 북한군이 개입한 폭동이다, 지난 4·15 총선은 부정선거다, 문재인은 빨갱이다’라고 구시대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은 통합당 전직 의원 등 책임 있는 인사들도 솜방망이 징계했으니 끝났다가 아니라, 이제라도 제명하셔서 제1야당의 기강을 바로 세우겠단 확고한 의지를 보여달라”며 “5.18 왜곡처벌법 등 온전한 진상규명을 위한 5.18 3법 발의도 당장 동참해주십시오. 그리하여 ‘김종인’이 보여주는 게 단순한 말의 성찬이 아님을 증명해달라”고 촉구했다.
한편, 김 위원장은 최근 들어 호남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호남에서 한 자릿수 지지율로는 안된다”며 ‘호남 끌어안기’에 공을 들이고 있다. 전국을 휩쓴 폭우로 섬진강 유역에서 홍수 피해가 발생했을 당시에는 전남 구례군을 찾아 당 차원의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다. 광주 민주묘역 방문 일정도 이즈음 결정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김 위원장은 전일 광주 5·18 민주묘역을 찾아 5·18 희생 영령을 기리는 추모탑에 헌화한 뒤 무릎을 꿇고 15초가량 묵념했다. 보수정당 대표가 추모탑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은 처음이라고 당 관계자는 전했다.
이후 민주묘지의 ‘행방불명자’ 묘역도 참배했다. 행방불명자 묘역은 민주화 운동 중 행방불명된 희생자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다. 참배 뒤 취재진 앞에 선 김 위원장은 “나는 신군부 집권을 위해 만든 국보위 재무분과위원으로 참여했다. 여러 번 용서를 구했지만, 결과적으로 상심에 빠진 광주시민과 군사정권에 반대한 국민에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며 “다시 한 번 이에 사죄한다”고 말했다.
발언 도중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던 김 위원장은 “호남의 오랜 슬픔과 좌절을 쉬이 만질 수 없다는 걸 알지만 5·18 민주 영령과 광주시민 앞에서 부디 이렇게 용서 구한다”며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죄송하고 또 죄송하다. 너무 늦게 찾아왔다”고 거듭 사과를 표했다.
아울러 “작은 걸음이라도 나아가는 것이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빌리 브란트의 충고를 기억한다”며 “제 미약한 발걸음이 역사의 매듭을 풀고 과거가 아닌 미래로 나아가는 작은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했다.
김 위원장의 사과에 묘역에 참석한 광주시민들의 반응도 엇갈렸다. 박수를 보내는 시민이 있는가 하면, 일부 시민들은 항의를 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