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 1971년 4대국 베를린 협약

양독 교류 국제 인정... 통일 초석

독일 주재 4대국 대사들이 1970년 옛 프로이센 대법원 청사에서 열린 서명식에서 양독간 교류 활성화를 국제적으로 인정하는 협약에 서명하고 있다.독일 주재 4대국 대사들이 1970년 옛 프로이센 대법원 청사에서 열린 서명식에서 양독간 교류 활성화를 국제적으로 인정하는 협약에 서명하고 있다.



1971년 9월 3일 오후 9시, 서베를린 구 연합국 관리위원회 건물. 미국과 영국, 프랑스, 소련이 4대국 협약식을 가졌다. 내용은 두 가지. 4대국은 동서 베를린 협정과 베를린 통행협정을 맺었다. 서독과 서방진영은 서베를린 자유통행권을 확보하며 주둔과 통행, 존속을 보장받았다. 실리를 내준 소련은 서베를린이 서독 영토가 아님을 확인하는 명분을 챙겼다. 동독은 4대국 협의문에 정식국호가 처음 들어가 국제적으로 존재를 인정받았다. 한마디로 2차대전 승전국들이 조금씩 주고받으며 동서독의 제한된 교류를 승인한 것이다.

4개국의 대사들이 합의문에 서명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6분. 그러나 과정은 쉽지 않았다. 1년 4개월 전부터 회의를 시작해 33회 145시간 동안 이견을 조정한 끝에 합의에 이르렀다. 4대국은 통행협정의 구체적인 내용을 독일 민족에게 맡겼다. 덕분에 동·서독 간 회담도 탄력받았다. 1972년 12월 상호 승인과 국제연합(UN) 동시 가입, 통행 규제 완화, 이산가족 재결합, 우편물 교환 확대 등을 골자로 하는 동서독 기본조약이 체결된 것도 이런 과정을 통해서다.


동·서독간 급속한 관계 개선의 추진 동력은 빌리 브란트 총리. 서 베를린시장과 외무장관을 거친 그는 치밀하고 강단 있게 동방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동구권과 관계를 개선한다는 그의 정책에 미국은 고개를 저었다. 브란트의 참모들은 미국에 ‘협조나 동의를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최대 우방인 당신들에게 가장 먼저 통고하는 것’이라며 민족 내부 문제라는 점을 각인시켰다. 미국과 견해가 갈릴 때면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미국은 우리와 불편해지는 것에 더 익숙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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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과 독·소 조약(1970.8)을 맺은 브란트는 폴란드에서 전 세계에 두 가지 충격을 안겼다. 첫째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 추념비 앞에 참회의 무릎을 꿇었다. 이틀 뒤 그는 독일의 고유영토로 인식되던 지역을 폴란드에 떼어주며 바르샤바조약을 맺었다. 실향민들은 ‘빨갱이들에게 독일의 영혼을 팔았다’며 맹공을 퍼부었다. 야당도 불신임안을 제출하고 예산으로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전부. ‘동독에 퍼준다’고 비난하던 기민당 출신 헬무트 콜 총리는 동독 지원액을 오히려 늘렸다. 베를린 장벽 붕괴(1990)에는 정파를 초월한 정책 일관성이 깔려 있다.

미국은 왜 서독을 놔뒀을까. 달러화 방어에 서독의 협조가 절실했다. 소련도 천연가스 판매를 의식해 서독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서독의 경제력이 자주외교를 거쳐 분단 극복으로 이어진 셈이다. 부럽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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