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동십자각] 물러설 줄 아는 것도 용장의 조건이다




정몽규 HDC그룹 회장의 핏속에는 ‘모빌리티맨(mobility man)’의 DNA가 흐르고 있다. 그는 포니정(정세영 전 HDC그룹 회장)의 아들로 태어나 지난 1988년 26세에 현대자동차 대리로 입사한 뒤 1996년 현대산업개발 회장 자리에 오르기까지 8년 동안을 자동차맨으로 살았다. 자동차와 거리가 먼 건설업체 수장에 오른 뒤에도 전사적자원관리시스템(ERP) 같은 제조업 시스템을 건설사에 선도적으로 도입했다. 아직 건설사들이 ‘주먹구구’ 경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때다.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선언한 뒤 마련한 기자회견 자리에서 ‘모빌리티그룹’ 전환을 외친 것도 정 회장이 직접 마련한 아이디어라고 한다. 선대(先代)의 모빌리티 드림을 육상에서 하늘길로까지 확장한 셈이다.

지난해 아시아나 인수전에서 경쟁자들보다 1조원 이상 많은 가격을 써냈던 배경에도 이 같은 원대한 포부가 있었다는 게 시장 관계자들의 관전평이다. 당시 인수전에 참여했던 한 투자은행(IB) 업계 관계자는 “유휴자산 매각 등을 감안해 1조원 초반 정도면 회사 정상화가 가능하다는 게 사모펀드(PEF) 운용사들의 공통적인 계산이었지만 현산은 오히려 이보다 1조원을 더 써 확실한 1위 항공사 자리를 굳히겠다는 전략을 세웠다”며 “입찰일에 현산이 써낸 가격을 듣고 모두들 두 손을 들었다”고 말했다. 단순히 항공업 진출을 목표로 한 게 아니라 그룹의 체질을 바꾸겠다는 확고한 목표가 있었다는 얘기다.


그랬던 정 회장이 최근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동걸 산은 회장과의 세 차례에 걸친 대면회담에서도 가타부타 뚜렷한 입장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급기야 산은은 매각계약을 해지하고 아시아나를 국적항공사로 전환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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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정 회장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자칫 아시아나를 품었다가 모체인 HDC그룹까지 함께 넘어질 가능성이 커서다. 대다수 글로벌 컨설팅 및 회계펌들은 코로나19 사태가 종식돼도 항공산업이 당장 살아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 모빌리티 산업에 대한 정 회장 본인의 애착과 인수를 포기할 경우 떼일 가능성이 큰 2,500억원의 계약금 문제가 중첩돼 HDC그룹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외통수에 몰렸다는 게 시장의 분석이다.

결국 이런 백척간두의 상황에서는 리더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 때로는 한발 물러나 와신상담하는 것도 용장의 조건이다. 정 회장의 과감한 판단이 HDC그룹과 아시아나를 모두 살릴 유일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서일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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