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사회적 역할은 계속 커지면서 각 분야에서 여성들의 약진이 눈에 띈다. 군대 역시 예외는 아니다. 다른 분야에 비해 아직 여군의 비중은 현저히 적지만 맡은 임무수행을 하면서 국방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다.
6일은 우리군에 여군이 창설된지 70주년 되는 날이다.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여군창설 70주년을 맞아 “6·25전쟁이 발발하자 구국의 일념으로 자원입대해 오늘날 자랑스러운 여군 발전의 초석이 된 여군 선배 전우님들께 깊은 경의를 표한다”면서 “여군은 지난 70년 동안 국군의 역사와 맥을 함께하며 발전해왔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여군의 역사를 보면 실질적으로는 70년을 넘겼다. 1948년 8월 26일 우리군 최초 간호장교이자 여성 군인이 임관을 했다. 30명의 간호후보생이 소위로 임관하면서 첫 여군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이들을 ‘여군’이 아닌 ‘낭자군’이라고 칭했다. 30명의 간호후보생 임관식 날 독립운동가이자 개화사상가인 서재필 박사는 “광복을 맞은 조국에 오니 이런 일도 다 본다. 우리나라에도 ‘낭자군’이 생기다니 정말 감격스럽다”며 이들과 일일이 악수를 했다고 한다. 이때 서 박사가 여성 군인을 이 같이 표현하면서 ‘낭자군’으로 불리게 됐다고 전해진다. 육군은 최초 간호후보생 임관식 날을 간호병과 창설일로 기념하고 있다.
이후 공군과 해군에서도 낭자군이 탄생했다. 다음해 1월 10일 여성비행사 이정희 중위가 임관을 했다. 1949년 10월 1일 공군이 창설됨에 따라 이 중위는 공군 최초의 여성이다.
1949년 4월 9일에는 해군이 자체적으로 양성한 간호장교 20명이 임관을 하게 된다. 3개월 후인 7월 30일, 이날은 ‘제3기 배속장교’로 편성된 여성 32명이 소위로 임관한다.
이들은 앞서 임관한 간호장교와는 다르다. 당시 정부는 중등학교급 이상에서 학도호국단을 조직하고 이를 지도할 교련교사를 육성을 추진 중이었다. 3기 배속장교는 여학교에서 학도호국단 간부를 훈련시킬 교관이었다.
여군의 수가 본격적으로 늘게 된 것은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부터다. 북한의 남침으로 나라가 위태로웠던 1950년 8월 31일 제주도에서 해병대 4기가 입대했다. 당시 입대 인원이 3,000여명이었으며, 여기에는 자원입대한 여성 126명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해병대 첫 낭자군이다. 입대 의무가 없었던 여성들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군인이 됐던 것이다.
그해 9월 6일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는 제2훈련소 예속으로 ‘여자의용군교육대’가 정식 발족했다. 이는 국군 내에 처음으로 여군 조직이 생겨난 것으로 정부는 이날을 여군 창설일로 기념한다.
1950년까지 여성 군인에 대한 공식적인 호칭은 없었지만 정부 문서나 당시 신문들을 보면 ‘낭자군’으로 표현하고 있다.
국방부 관계자는 “낭자군이라는 표현은 서재필 박사가 처음 사용했는데 중국 당나라 시대에도 여성으로 조직된 군대를 ‘낭자군’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며 “1951년 11월 15일 육군본부에 ‘여군과’가 설치되면서 정식으로 ‘여군’이라는 명칭을 썼다”고 설명했다.
전쟁 후인 1955년 7월에는 여군 훈련을 전담할 ‘여군훈련소’가 창설되고, 1967년 7월에는 육군간호학교가 정식으로 개교했다.
1990년대 들어 여군은 전환기를 맞는다. ‘금녀의 구역’이었던 육·해·공군사관학교가 여성에게도 문을 열었다.
1997년 공군사관학교가 여성의 입교를 허용했고, 다음해에는 육군사관학교, 그 다음해에는 해군사관학교가 여성을 받아들였다.
현재 여군의 수는 아직 10%도 넘지 못할 만큼 많지 않다. 이와 관련해 국방부 관계자는 “앞으로 여군 수를 계속 늘려갈 방침이다”며 “현재 여군 비율은 7.4%이며, 2022년까지 8.8%로 확대할 계획이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