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정책

투기자본 압박에 투자·고용 머뭇…"성장·분배 모두 망칠 것"

■ '경제민주화 우상'에서 벗어나라-변질된 주주 자본주의

기업규제 3법, 소액주주 보호보다 투기세력 활개 부추겨

행동주의 펀드 공격받은 기업, 이듬해까지 순이익 급감

한국만 글로벌기준 역행…경영권 방어 위한 '비효율' 심화

2116A05 메인(16판)



정부와 여당에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까지 가세한 ‘기업규제 3법(상법·공정거래법·금융그룹감독법)’이 주주독재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경제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주주지본주의가 강화되고 대주주들의 권한이 축소되면 그 과정에 앞장섰던 소액주주들은 사라지고 금융투자자본이 권력의 공백을 메우게 된다. 결국 전문경영인을 복속시킨 금융투자자본만이 이익을 챙기는 주주독재가 나타나는 것이다. 주주독재는 단기성과를 추구하며 기업의 투자·고용을 축소한다. 앞서 주주자본주의를 추구한 미국도 이미 주주독재로 변질되며 1%만이 큰돈을 버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정부 여당이 경제민주화라는 명분을 앞세우고 있지만 기업규제 3법은 성장도 분배도 망쳐 결국 양극화만 심화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20일 경제계에 따르면 정부는 이달 말 기업규제 3법을 국회에 제출한다. 이 가운데 정부의 상법개정안에는 △다중대표소송제 신설 △감사위원 분리선출 △3% 의결권 제한규정 개편 등의 내용이 담겼다.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지주회사 지분율 규제 강화, 사익편취 규제 대상 확대, 전속고발권 폐지 등을 포함한다.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법안이 소액주주 보호 등 애초 목적과 달리 기업의 경영권을 약화시키고 외국 투기자본과 금융투자자본의 영향력을 높이는 데 활용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기관투자, 고용도 수익도 나빠져

우리보다 앞서 주주자본주의를 강화했던 주요국에서는 이미 주주독재의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이10대 행동주의 펀드가 지난 2013년·2014년 공격한 글로벌 48개 기업의 공격 당시와 이듬해 성장성·수익성 등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모든 부문에서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났다. 행동주의 펀드가 공격한 기간의 고용인원은 4.8% 감소했고 다음해에는 18.1%나 줄었다. 매년 증가하던 설비투자는 공격 기간 중 2.4%, 직후 연도에는 23.8% 감소했다. 연구개발(R&D) 투자는 공격 기간에 기존 흐름을 유지했으나 다음해에 20.8% 줄었다. 당기순이익은 공격 기간에는 46.2% 감소한 뒤 다음해에는 83.6%까지 급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행동주의 펀드의 개입을 받은 기업의 자기주식 매입과 배당은 크게 늘었다. 많은 행동주의 펀드가 기업 성장보다는 주가를 끌어올려 단기 시세차익을 내고 떠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행동주의 펀드가 공격하기 1년 전 전년 대비 7~8% 내외로 증가하던 자기주식은 공격 기간 20.3% 증가했다. 배당금 역시 공격 기간 전년 대비 63.8% 급증했다. 공격 후 배당금은 전년 대비 줄었지만 당기순이익의 급감으로 배당성향(당기순이익 대비 배당금 비율)은 다음해까지 397% 폭증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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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으로 분배를 강화하려는 경제민주화가 투기세력을 끌어들이며 성장은 물론 분배까지 훼손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는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재벌개혁을 했지만 이후 양극화는 더욱 심해졌다”며 “재벌개혁이 안 된 것이 아니라 회사의 단기이익을 우선시하는 주주지향적 개혁이 이뤄졌기 때문”이라고 봤다. 신 교수는 이어 “우리나라 경제성장 과정을 보면 성장률이 높았을 때 분배가 개선되고 성장률이 떨어지면 분배가 나빠졌다”면서 “돈 많은 사람은 경제가 나빠져도 가용자본을 활용해 돈을 벌 수 있지만 가난한 이들은 임금 상승이 정체되거나 해고될 가능성이 높아져 분배가 악화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경영권 방어, 미래투자 재원 까먹어

해외 투기세력과 금융투자자본 등의 경영권 장악 행위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자원의 비효율성이 나타난다. 기업의 경영권 위협이 늘어나면 투자와 일자리 창출에 쓰여야 할 자금이 불필요한 지분 매입 등에 투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병태 KAIST 교수는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력투구해도 어려운 때에 기업인들이 자원과 노력을 경영권 보호에 전부 쏟아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다”며 “다른 나라에서는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을 고민시키고 자꾸 편법만 쓰게 만드는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세계 각국이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규제 완화에 주력하는 반면 우리만 글로벌 기준에 맞지 않는 규제를 신설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해외에서는 페이스북·구글·아마존·알리바바 등 정보기술(IT) 기업 중심으로 산업구조가 재편되면서 기술을 아는 창업자의 경영권을 강화하는 추세다. 미국 나스닥 상장사와 차등의결권을 도입한 기업의 2018년 평균 경영성과를 비교하면 차등의결권을 도입한 기업의 고용이 1.8배, 매출이 2.9배, 영업이익이 4.5배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기업의 경영권을 보호하는 것이 오히려 고용과 국민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의미다. 한상진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기업이 주권을 위협받지 않고 국민경제에 공헌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전 세계적인 추세”라며 “고도의 위험성이 있는 세계 자본시장에서 기업이 외부 세력으로부터 자율성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에 정치권이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세종=박효정기자 jpark@sedaily.com

박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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