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 1929년 최초의 계기비행

항공기 야간 운행 시대 개막

계기비행 실험을 위해 이륙을 준비 중인 NY-2 허스키 연습기. 후방조종석을 두커운 천으로 가렸다. 전방석 조종사는 만약을 대비해 탑승했지만 할 일이 없었다.계기비행 실험을 위해 이륙을 준비 중인 NY-2 허스키 연습기. 후방조종석을 두커운 천으로 가렸다. 전방석 조종사는 만약을 대비해 탑승했지만 할 일이 없었다.



1929년 9월 24일 동틀 무렵, 미국 뉴욕주 롱아일랜드 미첼 비행기지. 조종사 두 명이 탄 NY-2 복엽기가 안개 자욱한 활주로를 달려 하늘로 떠올랐다. 고도 150m에 도달한 NY-2기는 방향을 180도 틀었다. 두 번의 방향 전환으로 비행장 상공을 타원형으로 돈 NY-2기는 이륙 15분 만에 내려앉았다. 활주로에서 완전히 멈춘 순간,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가능성만 거론되던 계기비행이 처음으로 성공했기 때문이다.

시험비행은 정부와 군, 민간기업이 공동참여하는 국책 사업으로 진행됐다. 전쟁성과 상무부, 육군과 해군이 돈과 물자, 장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민간 계측회사들도 항공계측기기를 개발하고 소형화하는데 연구비를 쏟았다. 미국이 계기비행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항공기의 활용 극대화. 군은 야간이나 안개가 끼는 상황에서도 운행이 가능한 군용기를 원했고 상무부는 도시 간 야간 비행과 24시간 우편물 배송체제를 바랐다.


육군은 시험 비행에 에이스를 투입했다. 주 조종사 제임스 두리틀 중위(당시 29세)는 미 육군 예비항공대 소속으로 곡예비행에서 속도경쟁까지 우승을 휩쓴 조종사로 이름 높았다. 감각에만 의존해 24시간 동안 미국을 횡단한 경험도 있다. 미국 최초의 항공학 박사인 그는 두꺼운 천으로 감싸 시야를 가린 후방석에 앉아 계기에 의존하고 지상과 교신을 통해 이륙에서 착륙까지 안전하게 시험 비행을 마쳤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전방석에 탑승했던 벤자민 첼시 중위(23세)는 비행 내내 할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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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리틀은 계기비행의 개척자일 뿐 아니라 태평양전쟁에서도 이름을 남겼다. 항공모함에서 경폭격기를 발진시키는 기발한 착상으로 도쿄와 나고야를 공습, 일본에 충격을 안기고 미국인들의 사기를 고무시켰다. 감격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두리틀 중령의 어깨에 별(준장)을 달아줬다. 자신보다 뛰어난 참모를 꺼렸던 맥아더의 거부로 유럽 전선에 투입된 두리틀은 엄호전투기를 늘려 폭격기 손실을 줄이는데 공헌했다.

최초의 계기비행 성공에는 새로운 계측기기의 힘도 컸다. 프로젝트가 진행된 1년여 동안 수많은 장비가 발명되거나 개량돼 지상관제소에 설치되고 비행기에 실렸다. 두리틀이 탔던 NY-2기에도 방향계와 상승률 측정계, 소형화한 고도계와 자이로, 송수신 장치 등 새로운 기기 12개가 들어갔다. 두리틀이 시작한 계기비행은 오늘날 민간항공의 경우 이륙을 제외하고는 모든 비행과정을 기계로 대신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무인기 기술 선점을 위한 각국의 새로운 기기 개발 경쟁도 한창이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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