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얻는 것만 보고 잃는 것은 안 보려고 하면 균형 잡힌 정책이 나올 수 없죠.” 정부와 청와대·금융계·경제단체 등을 두루 거친 박병원(67·사진) 안민정책포럼 이사장은 28일 서울 강남의 ‘디캠프’에서 서울경제와 만나 “정부가 노동·기업·일자리·재정 등 주요 경제 정책에서 바둑으로 치면 한 수만 보고 둬서야 되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이날 3시간여 동안 진행된 인터뷰에서 “‘일자리 정부’를 표방하면서도 기존 취업자에만 유리한 정책을 쓰면서 교육·의료·부동산 등 서비스의 질적 고도화를 가로막고 적지 않은 투자 규제도 하고 있다”며 “이러면 일자리와 소비 창출이 일어나지 않는 정책 충돌 현상이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우선 정부·여당의 ‘기업규제 3법(공정거래법·상법·금융그룹감독법)’ 추진을 어떻게 보는가.
△기업의 우려를 최소화하는 대안을 갖고 진지한 토론을 했으면 한다. 기업에 불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이 돼서는 안 된다. 여당이 초안대로 밀어붙이지 말고 융통성 있게 접근해야 한다. 야당도 대안을 많이 내놔야 한다. 경제계도 수용 가능한 선에서 보완해 받아야 한다. 모회사 지분을 조금만 소유해도 자회사 경영진에 대한 소송이 가능한 다중대표소송제는 투기자본의 악용 우려가 없도록 자회사 범위를 합리적으로 따져야 한다. 대주주 의결권 3% 제한 조항도 조정해야 한다. 가격·입찰 담합에 대한 공정위의 전속고발권 폐지 문제도 고소·고발 남발 우려를 해소해야 한다.
-기업은 ‘노동시장도 기울어졌다’고 볼멘소리를 하는데.
△역대 정부가 노조 측에 유리한 일만 해왔는데 기존 취업자에 유리한 정책은 미취업자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지난 2016년 정년이 60세로 연장되며 2.7년가량 평균 근무기간이 늘어나게 됐는데 월급값을 못하면 해고까지는 아니더라도 임금을 30%가량 적게 받게 법에 규정했어야 한다. 연봉제·성과급·직무급으로 가고 임금피크제도 해야 한다는 법의 취지를 살리지 못했다. 고령자고용촉진법 19조 2항에 정년연장과 함께 ‘임금체계 개편 등 필요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고 했지만 누가 해야 한다는 것 등 구체성이 없고 불이행 시 벌칙 조항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야가 무책임한 법을 합의해 만들었고 정부도 균형을 잡으려는 조치를 하지 않았다.
-‘기업규제 3법’도 균형 있게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 정부는 최근 의료계 파업 사태를 불러왔던 의대 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신설 문제 등에서 보여줬듯이 뭐 한 가지에 꽂히면 그것을 밀어붙이려다 큰 대가를 치렀다. 경직된 자세가 문제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으므로 보완하는 자세로 가야 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타협과 조정이 잘 이뤄지지 않는 게 우리 사회의 문제 아닌가.
△이쪽은 “이건 안돼”, 저쪽은 “저건 안돼” 하다가 이른바 ‘되는 게 없는 나라’가 됐다. 경제 활성화를 위한 근본 토대는 자유다. 4·15 총선 직후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의원 연찬회에서 “보수우파 집권 시 국민에게 자유를 준 적이 있나. 노동규제·기업규제·공정거래 뭐 하나 성과 없이 자유도 평등도 주지 못했다. 진보좌파는 평등·민주·복지를 강조하는 것은 좋은데 자유를 뺏는 게 문제다. 규제를 개혁하고 국민과 기업에 자유를 줘야 한다”고 역설했다. 제발 ‘안 되는 게 없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미국·중국에서 가능한 것은 우리도 하게 해야 일자리도 만들고 복지도 확충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규제 공화국’이라는 말이 있는데.
△규제를 도입할 때 그 대가에 상응하는 보완조치가 뭔지, 지금 그럴 형편이 되는지 등을 따져야 한다. 법원이 통상임금 정의 확대로 기업의 임금 부담을 대폭 늘렸고 국회는 정년 연장, 행정부는 최저임금 인상과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추진했다. 모두가 이미 취직한 사람을 위한 조치다. 얻는 것만 보고 잃는 것은 안 보니 고용 창출 실패로 이어지는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기업들 상황이 설상가상인데.
△코로나가 사태를 악화시킨 것은 맞지만 지난 20~30년 동안 어느 정권도 일자리를 많이 만들고 취업 환경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제도 개선을 한 적이 없다. ‘일자리 정부’를 표방하는 현 정부도 이미 취업해 조직을 갖고 뭉친 사람들을 위한 일을 해왔다. 노동연구원 추계로 338만명이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고 있는데 최저임금 이하를 받은 일자리나 비정규직에라도 취업을 희망하면 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실업자를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노동법은 기존 취업자와 노조 보호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기득권을 양보하라고 해봐야 가능하지 않다. 새로 뽑는 사람부터 연봉제·직무급·성과급 중심으로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20여년 전부터 서비스업을 키워야 한다는 제안을 해왔는데.
△경제와 기술 발전으로 노동 수요가 급감했다. 서비스업 중 도소매·유통업은 일자리가 많이 늘어날 것 같지 않다. 결국 놀고 먹고 즐기는 일자리, 즉 엔터테인먼트·스포츠·음악·예술·관광 등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 정부가 소득주도성장 정책에서 가계소득 증대, 생계비 경감, 사회안전망 구축을 강조해왔는데 생계비 경감은 서비스업 육성 전략과 맞지 않다.
-양측이 어떻게 충돌한다는 것인가.
△사람들은 여유가 생기면 더 좋은 서비스를 원하는데 돈을 쓰지 못하게 하고 있다. 더 나은 교육을 원하는데 등록금을 12년째 동결하는 식이다. 주택청약에 2,600만명이나 가입했는데 절반 이상이 이미 집을 갖고 있지만 좋은 집에 살고 싶어 가입했다. 좋은 집을 공급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 의료수가를 제한해 놓고 의료의 질을 논하는 것도 맞지 않다.
-소득주도성장 정책 목표가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얘기인데.
△가처분소득을 늘려 수요를 불러일으켜 선순환 고리를 만들겠다는 발상인데 틀린 것은 아니다. 문제는 소득 증가 때 쓰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공급해줘야 하는데 틀어막고 있다는 점이다. 질적 고급화를 통해 수요를 늘려야 한다. 정책은 방향뿐 아니라 속도와 수순이 더 중요하다. 최저임금 인상도 이 정부 들어 급속히 추진하다 우여곡절 끝에 내년까지 결국 인상 폭이 평균 7%대밖에 안 된다. 2000년대 들어 9%대 평균 상승률보다 오히려 낮다. 지방자치단체가 의회와 협의해 물가 등을 따져 유연하게 정하도록 해야 한다. 청소년과 노인에게 똑같이 적용하는 것도 자칫 실직을 초래할 수 있다. 단 업종별 차등화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서비스업을 살리고 질적으로 고도화하는 방안은 무엇인가.
△규제를 풀고 고급화해야 소비와 수요도 증가한다. 서비스 산업에서 돈을 쓰지 못하게 하니 수요가 늘지 않는다. 놀고 먹고 즐기는 산업이 공급에서 규제가 너무 많다. 코로나19 사태 전 알프스의 돌로미티를 여행했는데 강원도 인제군보다 작은 곳인데도 케이블카와 산장이 각각 400개가 넘더라. 우리는 산악관광 인프라가 거의 없어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나가지 않았나.
-미래 성장동력 확충 방안이 있다면.
△자꾸 4차 산업혁명과 K뉴딜·그린뉴딜을 얘기하는데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경제와 일자리 문제는 그런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바이오 등 미래산업은 규제를 풀고 기업에 맡겨 놓으면 된다. 정부와 여당은 투자를 늘리겠다고 하는데 그동안 못하게 한 것들을 해주는 게 먼저다. 지난 정부에서 LG가 새만금에 대규모 첨단 유리온실을 설치해 농산물을 수출하려다가 농민 반발로 못했다. 이런 사례들이 참 많다.
-박 이사장은 스타트업을 키우는 ‘디캠프’의 산파역 아닌가.
△젊은이들이 자유롭게 네트워킹하고 멘토링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데 주안점을 뒀다. 이후 각 기업들이나 지자체도 창업 지원 공간을 만들고 구글캠퍼스·요즈마캠퍼스 등 외국계까지 들어와 이제는 공급 과잉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박근혜 정부 때 창조경제혁신센터를 대기업에 하나씩 떠맡겨 전국에 설립했는데 구태의연해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토지·주택 등 부동산 규제 문제는.
△땅값과 임대료가 너무 비싸 사업하기 힘들다. 토지 이용 규제를 확 풀어 공장은 물론 호텔·리조트·테마파크·주택·오피스 용으로 쓸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웬만한 나라가 집·도로·건물·공장 등으로 전체 땅의 13~14%를 쓰는데 우리는 8%가량만 쓰고 있으므로 이를 두 배로 늘려야 한다. 1970년대 초 박정희 정부의 그린벨트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자세도 문제다. 그린벨트를 풀어 노태우 정부의 1기, 노무현 정부의 2기 신도시에 이어 문재인 정부의 3기 신도시도 추진하는데 어쩔 수 없이 야금야금 푸는 식으로는 공급 부족과 높은 땅값을 해결할 수 없다.
-정부의 투기 수요 억제책에 대한 평가는.
△정부는 오는 2025년까지 임대주택의 25%를 공공에서 공급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나머지는 민간 몫인데 다주택자에게 중과세를 하고 임대주택사업자까지 규제하면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다주택자는 투기꾼이 아니다. 집값과 전·월세를 안정시키려면 공급을 늘려야 한다. 변두리에 신도시를 만든다고 강남 집값이 잡히지 않는다. 성남비행장 활용 등으로 서울 강남권에 공급을 대거 늘려야 한다.
-정부의 재정 지출 확대 속도가 가팔라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데.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의 급속한 확대는 굉장히 위험하다. 만약 외국인이 한국 경제의 장래와 국가채무 상환 능력을 의심하면 더 심각한 문제가 된다. 최근 내수 진작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소비성 지출이 늘어 우려되는데 꼭 필요한 사람한테만 재난지원금을 줘야 한다. 전국에 괜찮은 병원을 많이 짓고 스마트팜과 콘텐츠 산업 등에 투자하면 일자리가 생기고 세입이 늘어날 것이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
1952년 부산에서 태어나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서울대에서 법학 석사, KAIST에서 산업공학 석사, 미국 워싱턴대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5년부터 2년 가까이 재정경제부 1차관을 할 때 2기 신도시를 관장했고 이후 우리금융지주 회장에 이어 2008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을 했다. 이어 전국은행연합회장·한국경영자총협회장 등을 거쳐 현재 경영자총협회 명예회장과 故 박세일 교수의 공동체 자유주의를 설파하는 안민정책포럼 이사장을 맡고 있다. 은행연합회장 시절 스타트업 지원기관인 ‘디캠프’를 설립해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