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평화로운 정권 이양에 대한 확약을 거부하자 많은 사람들은 설사 오는 11월 선거에서 패한다 해도 그가 백악관을 떠나지 않을 것이며 이를 위해 폭력까지 동원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표출했다. 하지만 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해도 트럼프가 합법적이고 합헌적인 방법으로 대통령직을 유지할 수 있는 장치는 여러 개가 이미 마련돼 있다.
미국의 대통령 선출제도는 직접민주주의 방식에 맞춰 고안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당히 복잡하다. 미합중국 헌법은 각 주가 제각기 대통령선거인단을 선택하고 이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여 투표를 통해 대통령을 뽑도록 규정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주민들의 직접투표에서 승리한 후보 진영의 선거인들로 해당 주의 공식 선거인단을 구성한다는 법이 제정됐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주 법일 뿐 헌법에 명시된 의무가 아니다.
선거 주간의 시나리오를 가상해보자. 선거 당일인 11월3일에는 트럼프가 우세를 보이지만 며칠에 걸쳐 우편투표와 부재자투표 개표작업이 진행되면서 점차 민주당 후보인 조 바이든 쪽으로 전세가 기울게 된다. 결국 공화당은 수백만건의 우편투표에 대해 법원에 이의를 제기할 것이고 민주당 역시 맞불을 놓을 것이다. 이 같은 혼란을 빌미삼아 주 의회들이 전면에 나서 독자적으로 선거인들을 선택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불길한 대목의 시초다. 선거 결과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접전지로 꼽히는 전국 9개 주 중 8개 주의 주 의회가 현재 공화당 수중에 있다. 이들 8개 주의 주 의회는 투개표 과정에 심한 혼란과 부정이 있었다며 독자적으로 주의 공식적인 선거인단을 지정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은 공화당 측 선거인들로 채워진 선거인단일 것이다.
민주당도 소송을 제기할 것이다. 일부 주에서는 민주당에 속한 주지사 혹은 주 총무장관이 그들이 지지하는 선거인들을 선거인단 투표가 진행되는 워싱턴DC로 보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혼란이 가중될 수밖에 없지만 이 역시 공화당의 노림수 중 하나다.
내년 1월6일 선거인단 투표를 집계하기 위해 의회가 소집되면 당연히 일부 선거인들에 대한 합법성 논란이 불거질 것이고 공화당 의원들은 논란에 휩싸인 주의 선거인들을 집계에서 제외하자는 안에 동의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양당 후보들 중 누구도 당선에 필요한 270명의 선거인단 표를 확보할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헌법이 정한 바에 따라 연방하원이 대통령을 선출하게 된다. 하지만 하원의원 모두가 투표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각 주에 단 하나의 투표권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현재의 선거 판세가 그대로 유지될 경우 공화당은 26개 주의 선거인단을, 민주당은 23개 주의 선거인단(1개 주는 무승부)을 각각 확보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하원 투표 결과는 트럼프의 재선으로 귀결된다. 단지 하원 투표 결과를 수락하는 것으로 트럼프의 대통령직은 합헌적으로 유지된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손대지 않고 코를 푸는 셈이다.
트럼프는 이 같은 일련의 절차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다. 이미 수개월 전부터 그는 투표 당일의 개표 결과를 선거의 최종 결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주에도 그는 우편투표가 아니라면 자신이 재집권할 것이기 때문에 정권이양을 둘러싼 우려는 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특정 시점에 도달하면 의회가 대통령을 선출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시나리오가 펼쳐지면 지방의 공화당 지부들 역시 공정한 선거보다 당의 승리를 우선시할 수밖에 없다. 유감스럽게도 최근의 역사는 대부분의 공화당 지부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정권 유지에 최우선순위를 부여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여러 주의 공화당 지부는 투표참여를 억누르려 시도했다. 2012년부터 2018년 사이 텍사스주는 750개의 투표소를 폐쇄했다. 이들 중 542곳은 같은 기간 흑인과 라티노 유권자들의 수가 가장 크게 늘어난 50개 카운티의 투표소들이다. 조지아주는-수 차례의 조사 결과 대부분 허구로 드러난 투표자 사기 방지를 핑계 삼아 유권자 명부에서 150만명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플로리다주의 경우 공화당주지사와 주 의회가 합작해 흑인들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중범 전과자들의 투표권을 회복시킨다는 내용의 주민발의 법안을 효과적으로 무력화했다.
권력의 향배는 선거에서의 과반 득표로 갈리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결정된다고 믿는 공화당 때문에 미국의 민주주의는 심하게 훼손되고 있다. 지난 2018년 중간선거에서 위스콘신주의 공화당은 45%의 득표율을 올리는 데 그쳤지만 선거구 재조정 덕에 주 의회 의석의 65%를 차지했다. 공화당은 전국 무대에서도 이 같은 상황에 익숙해진 상태다. 1992년 이후 직접투표에서 승리한 공화당 대통령후보는 미국 역사상 최악이라는 테러 참사의 여파 속에 치러진 2004년의 이른바 ‘애국선거’로 재선에 성공한 조지 W 부시가 유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화당은 1992년 이후의 28년 중 거의 절반 동안 백악관을 점령했다.
미국은 세계의 지도적 민주주의 국가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모호할 뿐 아니라 삐걱거리기까지 하는 헌법절차와 극단적인 당파적 편견으로 말미암아 올해 11월의 미국 선거는 ‘바나나 공화국(banana republic)’에 필적할 만한 민주주의의 기능장애를 세계 만방에 내보일지 모른다.